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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헌 시인 / 심장을 가졌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4.

김지헌 시인 / 심장을 가졌다

 

 

양파를 썰다가 왼손 중지 첫째 마디를 베었다

둑이라도 무너진 듯 솟구치는 통증 아래

붉은 아가미가 입 벌리고 있다

어떤 힘으로 마그마가 틈을 찾아냈는지

이미 굳어버린 고집을 흔들어 따뜻하게 대지를 적시는

붉은 소낙비

심장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눈물 흘리는 것으로는 너의 반의반도 적시지 못한다는 듯

신은 어느 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여 버려진 어둠을 헤치고 담장 안에 장미를 심으라 명령을 내렸다

꽃과 가시를 내장한 채 줄줄이 담장을 넘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전장에 나가는 붉은 군사들에게

신은 또 명령한다

꽃이라는 문장으로 세상을 제압해보라

생이라는 협곡을 통과하기 위해선

가시에 찔리고 피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

소낙비가 그치고 붉은 아가미가 닫히고

넝쿨장미는 줄줄이 담장을 넘으며 너머의 세상을 향해

온몸을 발기하고 있다

 

 


 

 

김지헌 시인 / 뜨거운 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쯤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붉은 홍시 같은 달이 야트막한 언덕을 비추며

조금만 더 가보라고 한다

 

전력질주 하는 손흥민을 보며

발이 축구공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인간이 갖고 있는 206개의 뼈

간절한 기도와 이야기가 새겨진 신전의 기둥

 

지금 서있는 곳이 그의 일생의 결론이다

가장 처절하게 달려 도달한 그 곳

무수한 발이 뒤 따르고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히고

종착에 도달 할 때 까지 때로는

접질려 절뚝거릴 때도,

연골이 닳아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에 찬 뼈들을 오래오래 달래가며

한 밤의 환호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80여년을 달려온 어머니의 발도 우리 집안의

전력질주였다

 

 


 

김지헌 시인

1956년 충남 강경에서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졸업.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다음 마을로 가는 길』 『회중시계』 『황금빛 가창오리 떼』 『배롱나무 사원』.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