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시인 / 녹스는 기후를 지나
벌써 여름이 다 가려고 했다. 이상하다. 여름의 막바지에 장마가 찾아오는 일은.
지독한 여름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았다. 몇 권의 작은 책과 노트북과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선다. 우산을 펼쳐보니 접어둔 우산살이 온통 녹슬어 있다. 어쩌면 오늘의 외출은 녹슨 우산을 잃어버리러 가는 길이라는 예감. 갈 곳은 혼자 온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카페. 오늘은 자주 가는 카페에 가고 싶지 않아 조금 멀어도 낯선 카페를 찾아가기로 한다. 오늘은 비가 길게 내리는 날이라고 재난 문자가 온다. 착하고 성실한 일꾼들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덕에 비를 맞아도 안전하다는 생각. 오늘은 왠지 비가 예보도 없이 사선으로 내린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도화지에 내리는 비는 언제나 직선이라 좋았는데. 나는 사선을 그리지 못하기 때문에 자라지 않는 걸까. 재난 문자 때문일까. 카페는 한적했다. 외출을 하지 않는 착한 시민들이 만들어준 한적함 속에서. 가로수가 보이는 2층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따뜻한 커피를 시킬까 하다 여름에게 작별을 고하는 마음으로 아이스 커피를 시키기로 한다. 아이스 커피는 미리 티슈를 받쳐주어야 한다. 유리컵은 재난의 표면을 가졌으므로. 유리컵에게 재난 문자를 보내는 마음으로 티슈를 깔고 2층 창가를 바라본다. 문득 나는 나쁜 시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일러바치고 싶은 나쁜 시민. 여기요 재난 문자에도 재난을 향해 가는 나쁜 시민이 있어요. 조난자를 구경하려고 여기까지 왔대요. 불안 속에 존재하는 허상의 조난자가 아니라 재난 속에 우뚝 서 있는 실물의 조난자. 집을 나선 이유가 실은 비 맞는 가로수가 보고 싶었기 때문. 반바지로도, 슬리퍼로도, 재난 문자로도 감당할 수 없는 비를 가로수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나. 집에 있으면 온통 그런 게 궁금하고 불안한 소시민. 그러면서 창밖의 가로수를 오래 바라보았고 떨어지는 잎이 열 개가 넘도록. 커피잔 밑에 깔아 둔 티슈가 다 젖도록. 홀로 마른 사람이 되도록. 카페에 앉아 산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뒤적이고. 그러다가 비가, 그러니까 하루 종일 내린 비가 그칠 때 즈음. 벌써, 라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탁자의 물기를 닦고 카페를 나선다. 돌아가는 길에 비에 젖은 가로수를 발로 걷어찬다. 남은 물기를 털어주려고. 나무비가 내리고 나는 나무 비 만큼 젖어버리고
집에 돌아온 나는 나를 멋대로 펼쳐둔다. 가로수는 녹슬지 않는다. 그런 것을 교훈으로 얻으면
이재민이 발생했다
게다가 그들은 언제나 타인들*
*뒤샹의 묘비명 ‘게다가 죽은 건 언제나 타인들’의 변용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2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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