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소영 시인 / 무쇠난로
너를 가졌다 천지가 눈으로 소복할 때 불꽃 속에서 마주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다보았다 까맣게 윤이 나는 네 가슴 속에 묻었다 꺼내주는 재 묻은 고구마가 입 벌린 밤이 그 따뜻함을 흔들며 흐르는 시간의 상실(喪失)을 잊게 해주었다
매서운 북풍이 두 손 가득 눈을 움켜쥐더니 씨앗은 다 털리고 쓸쓸히 말라가는 빈 콩대 위에 사납게 흩뿌리고 간다 비닐하우스의 지붕이며 벽을 한바탕 들었다 놓으며 심술을 부린다 그럴 때마다 그 든든한 어깨에 기대어 나는 꿈쩍도 않는다
흐르는 음악처럼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네가 옆에 있어 행복한 시간이다
2009년 문학선 신인상 수상작품 송소영 시인 / 청솔모도 껌을 먹는다
저만치 길에 떨어진 아세로라향 껌 한 덩어리 웬 떡이냐 힘껏 달려가 누가 빼앗을까 덜컥 물었다 입 주변에 반쯤 붙어버린 그 놈은 아무리 뱉고 떼려고 해도 수염과 주둥이 살에 달라붙어 대롱거릴 뿐 향내도 어느 덧 머리 아프고 단물도 빠져 다른 먹이조차 제대로 찾아 먹을 수 없다 껌을 떼려고 그는 수염까지 뽑아가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결국 그 장애를 피하며 조금씩 먹는 법을 터득했다 그렇게 삭아 떨어질 날을 기다리며 고통스럽게 시간에 부대끼다 제 몸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는 보잘 것 없고 밉상스러운 길에 떨어진 증오 한 조각을 바라보면 그만큼 치열했던 삶이 그리워 눈물이 난다
송소영 시인 / 가끔씩은
사흘 동안 비가 내려 굳었던 마음 녹아내린다 그대의 손을 잡고 싶다 작은 손에 꽉 차던 따듯한 우주 다툴 일이 무엇인가
가끔씩은 잊고 사는 우리의 해묵은 사랑을 꺼내 비에 씻어보자 훗날 혼자 남아 시간의 땟물을 닦지 않도록 아파하지 않도록
송소영 시인 / 부재(不在)
제 것은 장롱 깊은 곳에 숨기고 나는 나를 향한 그의 사랑에만 목을 매었다. 꿈인 듯 스쳐간, 끊임없이 떠돌던 저 어리석은 시간들 위에도 어김없이 겨울은 왔다 날마다 백야처럼 쌓이는 눈 독한 보드카를 병나발 불어도 덜덜 떨리고는 했다.
이 세상에 불변인 것은 없다
이제 오십이 넘어서야 장롱 활짝 열고 깊이 어딘가 숨긴 곰팡이 얼룩 든 사랑을 찾는다 구석구석 헤집는다 먼지 하나까지 들추고 털어보지만 끝끝내 못 찾는
그것은 어디로 잠적했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바람 불어 시원한 날 나는 오대산 중대에 올라 푸른 하늘 그 너머만을 그저 막막하게 바라본다
송소영 시인 / 수련 개화하다
봉오리 속에서 숨죽여 지내온 한 달 내 갑갑한 시간 이제 너는 등 곧추세우고 하늘 향해 조금씩 꽃받침 내리고 온몸을 소리 없이 연다 짓물렀던 눈두덩을 비비고 속내 깊이 뼛속까지 다 드러나도록 햇살 속에 씨방까지 연다 심장 깊숙이 관정을 박은 벌들과 진딧물에 몸살을 앓는다 한낮의 잔열마저 떠나고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목이 긴 너는 꽃잎을 서서히 접는다 꽃받침까지 빗장을 꽉 질러 닫는다 넓은 이파리 위에 지친 몸을 풀고 비스듬히 고요에 기대앉는다
저 정갈한 삶 옆에서 나도 귀찮게 달라붙는 탐심들을 쫓으며 언제쯤 몸을 열어야할까
송소영 시인 / 정자시장에서
아침마다 정자시장 가는 주택가 길 모퉁이에서 그녀를 만난다 얼룩덜룩 분칠한 듯 부석부석한 얼굴 맥고모자 밑으로 삐죽삐죽 보이는 서리 내려앉아 몇 올씩 붙어있는 머리칼 그녀는 쑥개떡 뻥튀기 검은 콩 메주콩들을 리어카 좌판에 가득 진열해 놓았다
그녀처럼 오늘 하루만은 리어카 난전에 펼쳐놓아도 아무도 안 사갈 내 쉰 몇 해 볼품없는 삶을 비린내 가득한 이 정자시장에 풀어놓고 싶다 척 시장바닥에 앉아 한번쯤은 나도 머리와 가슴 속 가득한 욕망들을 껌처럼 그녀에게 쫙쫙 씹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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