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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소영 시인 / 무쇠난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4.

송소영 시인 / 무쇠난로

 

 

너를 가졌다

천지가 눈으로 소복할 때

불꽃 속에서 마주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다보았다

까맣게 윤이 나는 네 가슴 속에 묻었다 꺼내주는

재 묻은 고구마가 입 벌린 밤이

그 따뜻함을 흔들며

흐르는 시간의 상실(喪失)을 잊게 해주었다

 

매서운 북풍이

두 손 가득 눈을 움켜쥐더니

씨앗은 다 털리고 쓸쓸히 말라가는 빈 콩대 위에

사납게 흩뿌리고 간다

비닐하우스의 지붕이며 벽을

한바탕 들었다 놓으며 심술을 부린다

그럴 때마다

그 든든한 어깨에 기대어 나는

꿈쩍도 않는다

 

흐르는 음악처럼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네가 옆에 있어 행복한 시간이다

 

 


 

 

2009년 문학선 신인상 수상작품

송소영 시인 / 청솔모도 껌을 먹는다

 

 

저만치 길에 떨어진 아세로라향 껌 한 덩어리

웬 떡이냐 힘껏 달려가

누가 빼앗을까 덜컥 물었다

입 주변에 반쯤 붙어버린 그 놈은

아무리 뱉고 떼려고 해도

수염과 주둥이 살에 달라붙어 대롱거릴 뿐

향내도 어느 덧 머리 아프고

단물도 빠져

다른 먹이조차 제대로 찾아 먹을 수 없다

껌을 떼려고 그는 수염까지 뽑아가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결국 그 장애를 피하며 조금씩 먹는 법을 터득했다

그렇게 삭아 떨어질 날을 기다리며

고통스럽게 시간에 부대끼다

제 몸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는

보잘 것 없고 밉상스러운

길에 떨어진 증오 한 조각을 바라보면

그만큼 치열했던 삶이 그리워

눈물이 난다

 

 


 

 

송소영 시인 / 가끔씩은

 

 

사흘 동안 비가 내려

굳었던 마음 녹아내린다

그대의 손을

잡고 싶다

작은 손에 꽉 차던

따듯한 우주

다툴 일이 무엇인가

 

가끔씩은

잊고 사는 우리의

해묵은 사랑을 꺼내

비에 씻어보자

훗날

혼자 남아

시간의 땟물을 닦지 않도록

아파하지 않도록

 

 


 

 

송소영 시인 / 부재(不在)

 

 

제 것은 장롱 깊은 곳에 숨기고

나는 나를 향한 그의 사랑에만 목을 매었다.

꿈인 듯 스쳐간,

끊임없이 떠돌던 저 어리석은 시간들 위에도

어김없이

겨울은 왔다

날마다 백야처럼 쌓이는 눈

독한 보드카를 병나발 불어도 덜덜 떨리고는 했다.

 

이 세상에 불변인 것은 없다

 

이제

오십이 넘어서야

장롱 활짝 열고

깊이 어딘가 숨긴 곰팡이 얼룩 든 사랑을 찾는다

구석구석 헤집는다

먼지 하나까지 들추고 털어보지만

끝끝내 못 찾는

 

그것은 어디로 잠적했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바람 불어 시원한 날 나는

오대산 중대에 올라

푸른 하늘 그 너머만을 그저

막막하게 바라본다

 

 


 

 

송소영 시인 / 수련 개화하다

 

 

봉오리 속에서

숨죽여 지내온 한 달 내 갑갑한 시간

이제 너는

등 곧추세우고 하늘 향해

조금씩 꽃받침 내리고 온몸을 소리 없이 연다

짓물렀던 눈두덩을 비비고

속내 깊이 뼛속까지 다 드러나도록

햇살 속에 씨방까지 연다

심장 깊숙이 관정을 박은 벌들과

진딧물에 몸살을 앓는다

한낮의 잔열마저 떠나고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목이 긴 너는 꽃잎을 서서히 접는다

꽃받침까지 빗장을 꽉 질러 닫는다

넓은 이파리 위에 지친 몸을 풀고 비스듬히

고요에 기대앉는다

 

저 정갈한 삶 옆에서

나도 귀찮게 달라붙는 탐심들을 쫓으며

언제쯤 몸을 열어야할까

 

 


 

 

송소영 시인 / 정자시장에서

 

 

아침마다

정자시장 가는 주택가 길 모퉁이에서 그녀를 만난다

얼룩덜룩 분칠한 듯 부석부석한 얼굴

맥고모자 밑으로 삐죽삐죽 보이는

서리 내려앉아 몇 올씩 붙어있는 머리칼

그녀는

쑥개떡 뻥튀기 검은 콩 메주콩들을

리어카 좌판에 가득 진열해 놓았다

 

그녀처럼 오늘 하루만은

리어카 난전에 펼쳐놓아도 아무도 안 사갈

내 쉰 몇 해 볼품없는 삶을

비린내 가득한 이 정자시장에 풀어놓고 싶다

척 시장바닥에 앉아

한번쯤은 나도

머리와 가슴 속 가득한 욕망들을

껌처럼 그녀에게 쫙쫙 씹히고 싶다

 

 


 

송소영 시인

1955년 대전에서 출생. 2009년 《문학·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랑의 존재』가 있음. 수원문학 젊은작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 현재 수원문학 편집장으로 활동.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