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시인(익산) / 폭설
함박눈은 펑펑 내리는데 탁발 나간 스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길을 잃으면 호랑이 눈빛을 보고 길잡이 삼아서 오면 되고 길이 막히면 늑대 떼 뒤를 따라서 늑대 굴로 가면 되고 길이 끊기면 나귀를 빌려 타고 오라는 말씀에 약방에 심부름을 간 동자승은 새끼 당나귀를 빌려 타고 돌아왔다 처음 출가하던 날 스님은 동승을 등에 업고 절 문 앞까지 걸어가면서 이렇게 높은 곳을 바라보면 길눈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삭발을 하면서 이렇게 머리를 짧게 밀어야 세상이 더 넓게 보인다고 하였다 법당 벽화에 아침 햇살이 노루 꼬리만큼 찔끔 비추었다 뽀얀 눈 먼지가 일으키면서 급히 자전거를 타고 온 읍내 파출소장이 동자승에게 회색 털모자를 보여주면서 이 모자의 주인이 스님께서 쓰던 물건이냐고 물었다 소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낡은 고무신을 내밀면서 이 신발이 노승께서 신던 신발이냐고 물었다 스님께서는 동자승이 타던 흰 암당나귀 발자국을 뒤따라가다가 이튿날 싸리나무숲 속 암자 근처 눈 속에서 합장하고 앉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 시집 이상훈 시집 [나비야 나비야](황금알, 2013년).
이상훈 시인(익산) / 여문 꽃씨를 받으면서
그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꽃을 가꾸면 나는 정성을 다해 꽃대를 손질하였습니다
그대와 헤어지는 날 찔끔 한 줌 햇살에 벼락같이 꽃이 피고요 그대가 떠나는 날 별안간 부는 바람에 후다닥 꽃이 지고요
그대는 떠났지만 꽃은 그 자리에 피었고요 이듬해에도 여지없이 그 자리에 또 피었고요
절로 피는 꽃은 없다는 그대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대가 애써 일군 꽃길에서 여문 꽃씨를 받아 내년에도 싹을 틔워 꽃을 피우겠습니다
ㅡ시집 『나비야 나비야』(황금알, 2013)
이상훈 시인(익산) / 이별이란 그런 것이다
오랑케 꽃이라고 부르는 전한 이름으로 한평생을 살다가 가는 일이다 평소에 진중하던 뒤란의 백봉선화를 흠모하면서 무릇 소박하게 살아길 일이다 키가 훤칠하고 구티나는 모과나무를 처음 보고서 왜 이렇게 추하고 못생긴 열매를 맺었는지 누구나 한 번쯤은 의아해했을 것이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이내 파안대소하면서 모과나무가 왜 모과나무인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신생아로부터 산모 젖을 떼는 일은 포유류의 습성을 알면 참 손쉬운 일이다 예리한 매의 발톱과 비호처럼 날랜 용맹으로 단번에 젖꼭지에서 입술을 떼는 일이다 이별이란 먼저 결기를 다진 사람이 먼저 결연히 떠나는 것이다
- 이상훈의 최근 시집 〈미인도>에서
이상훈 시인(익산) / 나비야 나비야
키가 큰 기린우체부가 솟을대문 지붕 위에 편지 한통을 놓고 갔다 소인국나라의 가난한 시인 달팽이님 귀하 앞으로 배달된 편지는 나비나라 별정우체국소장의 소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외출 시 자물쇠 걸고 문패를 바꿔달고 나가는 습관을 가진 집주인 달팽이는 오랫동안 집을 비워 두고 문상을 갔다 수취인 부재중으로 되돌아온 편지에는 전국 나비연합회 원로 일동 올림이라고 적혀있었다 약도가 그려진 부고장을 한 장 달랑 들고 장례식장에 갔다. 상주는 슬피 울면서 망자는 3년 전에 이미 출상했다고 말했다 물어물어 무덤까지 찾아가는데 또 3년이 걸렸다 달팽이 영감은 무덤의 높이를 재기 위해서 양손에 수평과 먹줄을 들고 꼬리에 그림쇠를 묶고서 현장을 답사하고 도형을 측정하는데 그의 걸음은 무려 1억 3천 5백 리 75보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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