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심 시인 / 송장벌레
다른 생명을 죽여서 다른 생명들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생명도 결국은 자신의 몸을 다른 생명에게 헌납할 때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허물어 줄 때가 있다 무릇 생명에게 그런 비애가 있다
깊은 산이나 들에 가면 아무런 수의도 갖추지 않고 땅에 누운 주검들을 볼 수 있다 다른 벌레들이 양껏 가져간 후 남은 그 만에 집을 짓는 곤충이 있다 송장벌레는 그 죽은 집을 뜯어먹으며 그 속에서 새끼를 키워낸다 그 몸을 내어 준 주검이 아름답다 자기가 먹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가는 송장벌레의 누추한 살림살이가 아름답다
-시집 『불타버린 집』. <포엠토피아> 에서
이진심 시인 / 풍란
단단한 바위 사이로 몸을 밀어붙이는 풍란처럼 위태로움이 좋다
바람 속이 나의 집이었다 바람을 붙들고 바람 속에다가 잎사귀를 늘어트리는 풍란처럼 허공에 집을 지었다가 부수고 지었다가 부수었다 디딜 곳이 없던 그 시절의 고통들은 수천 년처럼 길었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느리게 나를 관통해 지나갔다
죽음의 방법이 그토록 많다는 것에 나는 매혹이 되었다 나는 살아서 그 지옥을 지나왔다 다 지나와서도 지옥은 없어지질 않았다 흔적을 남겨 놓는다
가끔 내가 너무 어두울 때마다 그 흔적을 확인하러 나를 두드리러 온다
-시집 『불타버린 집』, 포엠토피아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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