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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심 시인 / 송장벌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3.

이진심 시인 / 송장벌레

 

 

다른 생명을 죽여서 다른 생명들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생명도 결국은

자신의 몸을 다른 생명에게 헌납할 때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허물어 줄 때가 있다

무릇 생명에게 그런 비애가 있다

 

깊은 산이나 들에 가면

아무런 수의도 갖추지 않고

땅에 누운 주검들을 볼 수 있다

다른 벌레들이 양껏 가져간 후 남은

그 만에 집을 짓는 곤충이 있다

송장벌레는 그 죽은 집을 뜯어먹으며

그 속에서 새끼를 키워낸다

그 몸을 내어 준 주검이 아름답다

자기가 먹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가는 송장벌레의 누추한

살림살이가 아름답다

 

-시집 『불타버린 집』. <포엠토피아> 에서

 

 


 

 

이진심 시인 / 풍란

 

 

단단한 바위 사이로 몸을 밀어붙이는 풍란처럼

위태로움이 좋다

 

바람 속이 나의 집이었다

바람을 붙들고

바람 속에다가 잎사귀를 늘어트리는 풍란처럼

허공에 집을 지었다가 부수고 지었다가

부수었다

디딜 곳이 없던 그 시절의 고통들은

수천 년처럼 길었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느리게 나를 관통해 지나갔다

 

죽음의 방법이

그토록 많다는 것에 나는 매혹이 되었다

나는 살아서 그 지옥을 지나왔다

다 지나와서도 지옥은 없어지질 않았다

흔적을 남겨 놓는다

 

가끔 내가 너무 어두울 때마다 그 흔적을

확인하러

나를 두드리러 온다

 

-시집 『불타버린 집』, 포엠토피아 에서

 

 


 

이진심 시인

1966년 인천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 11회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불타버린 집 > <맛있는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