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임 시인 / 쉰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려고 모처럼 책상 앞에 엎드린 한밤중 먼 창밖 화려한 불빛들이 이제는 생경하다
한때는 저 속에서도 빛나는 별이었을 텐데 침침한 눈을 부비고 또 부비며 앉아 천체가 움직이는 소리 들어보려 애쓴다
별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시절에 이르러 이번 생을 다녀간 기척이라도 남겨두려 별자리 한 땀 한 땀 기우며 나도 어두어져간다
《정형시학》 2021. 겨울호
이경임 시인 / 어느 봄날, 백목련 나무 밑에서
꽃들은 허공에서 진다 어떤 꽃들은 허공을 만지지 못하지만 이 백목련은 합장을 하며 기도하듯 핀다
백목련은 하안 거품이다 백목련은 하얀 거품이 아니다 백목련은 검은 호수가 아니다
목련은 높은 은신처에 숨어 있다 목련이 늙으면 땅으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
목련은 한숨이거나 도취이거나 저항이다 목련은 허공에서 땅까지 영겁 회귀하는 물질이다
나는 복린에 담긴 너의 강박관념이다 나는 시들어 땅바닥에 뒹굴기 때문에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시집 /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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