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정 시인 / 바다묘지 가는 길
문득 할머니- 하고 부르면 조개 무덤에서 할머니가 걸어 나오신다 혹부리걸음으로 두리번두리번 조개 칼을 찾으신다 방금 전까지도 바지락을 까다 나오셨는지 퉁퉁 불어터진 손가락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바다 냄새, 할머닌 지겹지도 않아요? 눈만 뜨면 조개봉분 하나씩 쌓아놓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난 어떻게든 이 섬을 도망치고 싶은데 빠삐용처럼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어 죽겠는데 할머닌 맨날 그렇게 태평히 앉아 조개나 까고 있을 건가요? 소리치며 손나팔을 불어댔지만 할머니 귓속의 방음벽과 방풍림을 뚫을 수가 없었다 먼바다의 풍랑이 아버지를 삼켰을 때도 야윈 등판이 한번 움찔거렸을 뿐 할머닌 가슴까지 고갤 묻고 조개를 까셨다, 다만 그날의 조개봉분은 그 어느 날보다도 높았었다 수없이 마음의 섬을 쌓았다 허물었다 반복하는 동안 할머니의 등은 봉분처럼 굽어지고 갯메꽃이 파도를 치는 어느 날 당신은 미리 준비해둔 무인도로 황망히 떠나셨다
시집 <예수를 리메이크 하다> 2008 문학세계사
문세정 시인 / 내가 잠든 사이 꽃은 피고
씽크대 배수구를 청소하다가 노란 싹을 보았네 새끼손톱만 한 이마를 밀고 올라오는 피마자 콩, 맵고 짠 물을 먹고 자라 가시처럼 억세진 뿌리 뻗어서 뻗어서 땅 속까지 닿겠네 머지않아 샛노란 피마자 꽃 펑펑 피워 올리겠네
아, 이제야 알겠네 깊은 밤 나를 깨우던 그 소리 무슨 신호처럼 똑, 똑 수돗물이 떨어지던 그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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