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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라연 시인 / 아름다운 너무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6.

 박라연 시인 / 아름다운 너무나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 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들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박라연 시인 / 겨울 사과나무를 위하여

 

 

제 키를 낮춘 만큼

탐스럽게 열리는 여자의 아이를 위해

앉은뱅이처럼 주저앉으려 하는 당신

온몸을 슬프게 구부리고만 있는 당신을 문득

태초의 어머니라 부르고 싶다

어쩌다가 벗은 몸의 처절한 자태를

나는 보고 말았는지

그때 그 순간은 이미 친숙한 운명이 되는지

내 죽어 한 그루 사과나무로 돌아와야 한다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위해 숨을 쉬는 나무들

그들이사 짐작도 못 할 따뜻한 수액들을

둥글게 둥글게 공중에 매달아두리

어느 쓸쓸한 가을밤 홀로 눈떠

온몸의 붉은 반점들을 빠짐없이

달디단 사과라 이름 붙이어 놓으리

 


 

박라연 시인

1951년, 전남 보성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와 수원대 국문학 석사, 원광대 국문학 박사 학위.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 산문집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박두진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