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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연성 시인 / 벼랑에 서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5.

김연성 시인 / 벼랑에 서다

 

 

 혼자였다 눈물은 오래 참다 뚝 떨어지는 순간, 저 바닥까지는 천길 벼랑과 같다 아무도 푸른 수심을 알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움켜잡았지만 어떤 번호도 떠오르지 않았다 숫자로 호명할 수 없는 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만 두 주먹을 불끈 쥐었을 뿐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바람 한 점 없는 풍경은 적막하였지만 어두워지는 도시를 내다보면서 그는 괜찮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함부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동료들에게 말을 걸었을 뿐이다 이제 이 더러운 세상과는 당분간 무관심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하루를 어떻게 외면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씨발時가 되자 연기처럼 사무실을 빠져나와 짧은 사거리를 빠르게 흘러갔다 지하철은 코뿔소처럼 캄캄한 땅속 어딘가에서 컥컥거리며 튀어나올 것이다 곧 낯선 얼굴들이 벼랑역에 또 도착할 것이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다음 달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미안하다는 상사의 표정 너머로

  어서, 가족이 보고 싶었지만 결국 혼자인 것이다

  그는 여전히,

 

 


 

 

김연성 시인 / 수도꼭지의 말

 

 

한밤중 누가 노크한다

어두운 마음에 안부를 전한다

가난이 짓무르도록 흐르고 싶었다

떨어지는 것은 물이 아니라 모진 마음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아래로 흐르고 싶었다

좁은 하수관 안으로 쏟아져,

꼬불꼬불 따라가면 푸른 바다가 되리라

검은 심연에 다다르리라

 

위풍 심한 창 밖의 기온은 영하 13도,

반 지하 전세방에 옹기종기 네 식구

서로를 홑이불 삼아 새우잠 자는 동안

수도꼭지 저 혼자 중얼거린다

얼지 마라, 얼지 마라

가난은 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덮어줘야 할 온기와 같은 것이니

마음이 마음을 덮을 수 있다면

허기진 몸뚱어리도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겠느냐

 

어둠도 섣불리 침투하지 못하는

반 지하 전세방 개수대에 붙어 있는

수도꼭지 말한다 곤한 식구들 깰까

밤새 가만가만 속삭인다

가난은 어둠과 같으니 한 잠 자고 나면

다시 환한 때가 오리라 창밖,

결빙의 시간 지나면 서럽도록 밝은 날이 오리라

 

똑,

똑,

똑,

!

!

!

 

 


 

김연성 시인

1961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 2005년 계간 《시작》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발령 났다』(천년의시작, 2011)가 있음. 웹웰간詩 <젊은 시인들> 동인. 서울 시청 재무과 근무. 2005년 계간 <시작> 신인상 당선. 현재 서울시청 재무과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