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 시인 / 엄마 되기
아이를 깨운다 아이를 깨울 수 없어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를 수 없어 사정을 한다 사정을 할 수 없어 운다 울 수 없어 그림을 그린다
절벽 위에 서 있는 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버텨낸 세월을 잰다 그림이 지워지고 시계가 거꾸로 간다
나무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는데 나무가 먼저 나의 결핍을 발설한다면, 이런 모순어법은 누구에게 발설해야 하는 것일까
최선을 다한다는 말보다 잔인한 말이 있을까 생각하다 잠자는 아이를 던져 버린다 낭떠러지가 뾰족해지는 이유는 피 흘리는 아이를 매달고 있기 때문이야
아이를 주워 다시 일으킨다 통증을 대대로 물려줄 순 없잖니 다른 애들은 이 시각에 책상 앞에 있단다 네게도 통점이 있다면 진짜 벼랑을 만들어 줄게 벼랑에 나무를 만들고 나무에 사다리를 매달아 너를 힘껏 끌어올려 줄게
어둠에 걸려 자꾸만 넘어진다 벼랑이 벌떡 일어서면 눈을 번쩍 떠서 어둠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넘어진다 허공에 매단 나무가 튼튼한지 보려고 헛손질을 해대며 잠꼬대를 한다
그려지지 않는 그림들이 바닥에 쌓여간다
계간 『시와 사람』 2022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 지우개 하나 빌려줘요
너의 문장이 나의 목을 누를 때 우리 사이는 아직 다 읽지 못한 책
관계에도 번호를 붙일 수 있다면 우리는 몇 번째 악문(惡文)일까
오독을 참을 수 없는 서로에게 지독한 난문
여백이 없어 읽기가 힘든 책
너는 네 입장대로 나를 나는 내 방식대로 너를
도입부만 읽다가 세 장쯤에 이르러 서로를 덮고 마는
문장과 단락 사이 해독의 강을 넘지 못해 아늑한 해저에 닿지 못하고
오늘은 너를 눕히고 네 위에 낙서를 가득 했어 검은 물이 줄줄 흐르는 우리는 서로의 검은 함정
낙서는 묵은 책장을 빠져나가는 벌레처럼 오래 파먹은 등 버리기
점점 가늘어져서 바닥에 끌리는 다리로 잠에서 깨면 얼룩진 페이지 그대로
우리 안에 가장 헐벗은 문장 하나 찾아내어 날마다 부지런히 고독을 덮는 거지
계간 『시와 사람』 2022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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