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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형철 시인 / 삼보(Zambo)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6.

전형철 시인 / 삼보(Zambo)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의 찌꺼기에요

높은음자리표를 닮은 계단에서 항상 내려다보며

잘못 찾은 사전을 손에서 놓지 못하지요

내 오드아이가

당신의 길을 살펴주진 못할 겁니다

하나의 단어가 뿌리 내린 시추 점을 찾아

한 개의 심지를 찾아

나에게 손을 내밀겠지요

번번이 바뀌는 증언에 대해 의심하지 마세요

안과 밖 모두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어린 아이의 기도가 폭격을 맞았거든요

미망인, 삼보, 말없이 걸어가죠

다시 기본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은혜로운 당신은 지혜롭게도 말합니다

모든 것은 혈관을 흐르는 핏톨들의 믿음 때문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차라리 잘 되었어요

이 네모난 겨울을 벗어나고 싶어요

거울 뒤편의 악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은 은도 금도 내게 없는 것도 당신에게 줄 수 없을 테니까

고양이는 시간이 멈춘 개와 태양으로 향하는 의자 가운데 앉아 있지요

눌은 발음을 비난하지는 말아요

어차피 눈이 보이지 않는 악사의 목소리는

삼보,

신은 미리 연습했을까요

전선으로 향하는 깃발처럼

삼보,

 

-계간 『딩아돌하』 2022년 여름호 발표

 

 


 

 

전형철 시인 / 나는 얌전한 돌을 사랑했지만

-이매망량(魑魅魍魎)

 

 

 아름다운 빛들은 착란에 가까웠다. 열기를 잃은 빛의 구석을 피해 조금 덜 추웠으면 싶었다. 앞선 느림과 뒤쳐진 빠름 사이에서 어둠에 쫓겨 연착하는 빛은 낮게 신음했다. 너는 너무 멀리 가지마. 신음소리가 태양으로 향하는 발정난 고양이 같았다. 따스했던 목소리와 촉촉한 발음이 지펴놓은 그물에 걸려 버둥거릴 때 하늘을 깨닫는 새처럼.

 

 병에 담아 띄운 편지에 답장이 없었다. 유리의 빈 껍질만 해안가에 가끔 발견됐다. 물의 행렬과 공기의 배열은 병 속 종이를 신비로운 무염으로 물들였다. 쌓아올린 벽돌 선들과 모래알이 구르는 자국을 따라 별의 주사위를 굴렸다. 처음처럼 허공의 농도는 외롭고 때때로 돌에게서 먼지에게로. 얼마간의 기다림이 어떤 몸을 얻을 참인가. 간격과 무게의 황금률에 기대어 오랫동안 뒤집지 못한 카드를 구겼다. 귀신고래만 잠수한다는 가장 깊은 해구의 1미터쯤 아래에서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는 인어처럼.

 

 꿈이 빗나갈 때마다 거울은 아래쪽으로 조금씩 몸이 쏠렸다. 벽이 복부에 꽂힌 책들을 빼 바닥을 타일처럼 정교하게 덮었다. 이 세계는 좀처럼 눈을 감을 수 없는데. 깨진 틈에 천천히 입을 오므려 숨을 불어넣었다. 애타는 입술과 마른 부레의 숨결이 강산(剛山)에 깃들 때까지 다리를 처음 본 물고기처럼.

 

 맨발에 다섯 색 매듭을 묶어 두었다. 줄은 제 꼬리를 물고 그르렁 거리며 시간의 거품을 길어 올렸다. 바깥에 호명할 갸륵한 이름이 늘어섰고 목숨의 도안이 책편처럼 부려졌다.

 나는 얌전한 돌을 사랑했지만 내내 가라앉거나 흔들리는 중이었고 생각하지 않는 어디에도 없는 돌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계간『딩아돌하』 2022년 여름호 발표

 

 


 

전형철 시인

1977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및  同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7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201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지훈창작상 수상. 현재 계간 『다층』 편집위원. 서울여대, 서울교대, 안양대 국문과 강사. 시집 『고요가 아니다』 『이름 이후의 사람』. 현재 연성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