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만섭 시인 / 석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6.

이만섭 시인 / 석류

 

 

혹여, 그리움을 가슴에 품되

그 열정 가슴만큼만

다독이지 못해 끝내 터져버린

붉은 속살은 감당할 길이 없구나

나는 환장이란 말이

무슨 뜻인고 했더니

저리도 미쳐 빠개져버린

가슴을 두고 이르는 말인 줄

차마 몰랐다

 

 


 

 

이만섭 시인 / 진화하는 사물

 

 

지우개를 사용하기 전 종이는

바닥에 등을 밀착시켜 표면을 정리한다.

경작지를 갈아엎듯 해일처럼 밀려오는

지우개의 출현에 명암이 분명한 글자들이

말끔히 지워지며 평면이 창백해진다.

생각이 차분할수록 빠르게 정돈되는 사물의 구체성은

보이는 그대로 이전의 상태와 구분되어 있다.

문장이 지워졌으니 의미도 상실하고

불변처럼 제자리를 지키던 것이 생각에 이끌린 것이다.

변화를 꿈꾼 나머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멀쩡한 물체가 부러진다거나

부러진 물체를 이어 붙인다거나

공간을 이동해 와 이해를 진작시키는

전람회의 그림 같은 사물은 도처에 자리한다.

진화는 영점에서 이행되는 것

지우개가 엄지와 검지의 수행자가 되기까지

그 자체만으로 옳았던 사물인데

부조리를 발견한 합리성에 힘입어

정위치의 고정관념을 벗고

형체를 정돈하여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ㅡ 『시인수첩』 (2022, 봄호)

 

 


 

이만섭 시인

1954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201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