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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리영 시인 / 깍두기 비빔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6.

김리영 시인 / 깍두기 비빔밥

 

 

며칠 째, 좁은 길 달려 집으로 오면

서걱이며 씹혀 올 식감이 떠오른다.

 

이미 잘린 깍두기를 싹둑싹둑 썬다.

잘린 것과 자르는 사람 사이

붉은 물이 튀어 오른 것도 잠시

 

간이 밴 무의 섬유질을

뜨거운 팬에 펼쳐 놓은 살림

들기름을 하염없이 두른다.

오갈 데 없이 노릇노릇 타는 밥술

 

더 늦춰질 수 없는 정년(停年)!

코로나가 사라질 때까지라도

일터에 눌어붙을 수 없을까?

 

포기할 수 없는 늦은 식사

깨작이던, 달빛 닮은 숟가락이

베이고 짓이겨져 파묻혀버린

완숙한 깍두기 맛을 퍼 올려준다.

 

 


 

 

김리영 시인 / 춤으로 쓴 편지

 

 

금박쾌자에 가슴띠 두르고 등장하면

어깨에 머문 긴장쯤 녹아내려야 해

낯선 관객 앞, 어색한 기분 가라앉히고

손끝이 자유롭게 움직일 거야

 

멎은 호흡 툭 떨어뜨리고

관자놀이 스친 손끝으로

희망을 길어 올려봐

지금이 절정이야, 기회를 미루지 마

두 바퀴 반, 도드라지게 돌고

아슬아슬했던 순간은 잊어버려

음악은 두 소절 남아 있어

 

단 한 장 찍어내는 모노타이프

발밑에 밟혀오는 뜨거운 활자들

3분 34초 공연 시간이 흘러가버리면

다시 불 켜져도 읽을 수 없을 거야

 

참을 수 없게 차오른 숨

춤으로 맥박을 바치는 편지를 전한다

 

 


 

김리영(金梨英) 시인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세종대학교 무용과 졸업. Southern Oregon University에서 Art 수학. 1991년 4월 《현대문학》에 〈죽은 개의 슬픔〉외 5편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서기 1054년에 폭발한 그』(현대시, 1993) , 『바람은 혼자 가네』(동학사, 1999), 『푸른 콩 한 줌』(문학아카데미, 2006)등과 『구름에 기대지 않는 춤』(바움커뮤니케이션, 2011 P&A시집)이 있음. 2012 제4회 바움문학작품상 수상. 2013차세대안무가클래스 대본, 출연. 2013 홍콩국제연극제 대본,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