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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운희 시인 / 그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10.

정운희 시인 / 그냥

 

 

설탕을 애인처럼 털어 넣는다

 

나는 칼이다. 라고 주문을 넣는다

칼로서 친절한 너를 토막 낸다

잠근 수도꼭지에서 정확하게 베어지는 물의 가락들

수면양말을 신고 한낮을 잠근다

 

눈곱위의 눈곱, 배꼽위의 배꼽, 웃음위의 웃음, 태양위에 태양

너 위에 나, 검은 꿈을 뒤적이다가

촛불을 켜놓고 나쁜 파티는 계속된다

거짓말이 자꾸 하고 싶어진다

 

그림자 피는 오후, 탈색된 문장이 쏟아져 들려왔다

자장면을 배터지게 먹었다 검은색과 친하고 싶다

 

사진을 찍는다. 해바라기 꽃은 긍정적이다

노하거나 슬퍼하거나

뒤돌아보면 배경에도 꿈이 있다

 

머리를 짧게 잘랐다. 도망치고 싶은 바람 부는 날엔

맛있는 것 먹고 휘파람도 불었다

저녁은 오고 너는 멀리 있다

다시 생각해도 13층은 절벽이다

 

혓바닥 위에서 설탕은 빠른 속도로 녹는다

너와 내가 한 몸으로 눈 뜨듯이

끈적거리는 오해나 슬픔 따윈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나이다. 그냥 계단이고 그냥 고양이고 그냥 먼지이듯이, 누군가 자꾸만 묻는다. 구름이 몰려가는 이유를, 구름은 그냥 구름이다. 그냥 창문이고 그냥 바다이고 그냥 노을이고 그냥 새이듯이, 그냥 너와 나 인 것이다. 그냥 걷는다. 그냥 노래한다. 그냥 헛것을 바라본다. 그냥 하품도 하고 그냥 하늘은 푸르고 그냥 네 손을 놓는다.

 

 


 

 

정운희 시인 / 우린 그때 십팔 세였다

 

 

창문은 그때 무엇을 했나

기웃거리던 새들은 창틀에 고인 햇빛을 쪼고 있다

 

운동장으로 교실을 비우자

담배와 피임약이 발각되고 따귀를 맞았다

우린 그 때 십팔 세였다

 

가출을 연습하고 약을 먹고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창문으로 하염없이 별이 내릴 때

책가방으로 배달되던 우리의 어금니들

 

순차적으로 골목을 배우는 일

골목의 키를 낮추어 마주보고

와락 껴안은 어둠을 오래도록 흘려보냈다

 

교실은 교실 밖의 목마름을 모르고

교실 밖은 교실 안의 습도를 모르고

 

존경해요 선생님, 카네이션을 들고

우르르 몰려가는 둥근 무릎들

우르르 넘어지는 설익은 붉은 빛들

 

그때마다 골목과 골목으로 숨어들며

샐비어의 키를 키웠지

붉게 호흡한다는 것

붉은 잠을 깨우고 붉은 낙서로 덧칠한 하루를 껴입을 때

 

혀가 길어지는 담장 밑에서

 

계간 『모: 든시』 2019년 봄호 발표

 

 


 

정운희 시인

충북 충주에서 출생. 《시로여는 세상》 2010년 봄호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안녕, 딜레마』(푸른사상, 2014)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