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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연희 시인 / 금몽禁夢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10.

정연희 시인 / 금몽禁夢

 

 

  어떤 꿈을 금지하는 걸까

  칠 벗겨진 현판과 삐꺽대는 누마루

  절집 연못에 연꽃 붉다

  팔월의 달아오른 햇볕이 꽃 속으로 쏟아져

  꽃방마다 불을 지폈다

  꽃을 사랑하던 아버지

  안마당에 꽃들이 병풍 자수처럼 고왔다

  한여름에도 옷을 껴입은 아버지는

  겹겹이 치마 두른 이국의 홍련과 같은 부족일까

  아버지가 오랜 출타에서 돌아오셨는지

  댓돌 위에 흰 고무신 가지런하다

  처마 끝 햇살이 신발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아버지는 꿈을 내려놓지 못하고

  가을볕 스러지듯 길을 재촉하셨다

  그 후로 우리에게 누마루는 금기의 장소가 되었다

 

  무릎에 앉히고 두상화를 가꾸듯 꿈을 쓰다듬으며​

  아가야

  꽃처럼 자기만의 날개를 간직하거나

  고니처럼 제 색깔을 가져야 하는구나

  무거운 진흙 더미 생애를 꽃피우려던 아버지

  나는 오랫동안 그 꿈에 미치지 못했다

  금몽암에 아라홍련이 등불을 하나씩 켜고 있다

 

-시집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천년의시작, 2022) 수록

 

 


 

 

정연희 시인 / 탄생

 

 

  상현달이 섬강에 얼굴을 씻는군요

  씨앗을 품은 미완의 덩이

  두 손으로 받아도 미어질 것 같군요

  세 생명이 이 별에서 완성되는 내밀한 시간

  월견초 따스한 기운이 밤의 한가운데로 모여들어

  강변 풀섶이 온통 노란 붓 칠 소용돌이군요

  당신은 허리 굽혀 미지의 세계를 기다리고 있군요

  풀벌레들의 장엄 돌림노래 가까워졌다 멀어지는데

  수도원 담장 너머 들리는 저녁 찬송과 어우러진 칸타타

  밤 깊도록 이어지는군요

  내 허물을 대신 깁는 기도일까요

  맑은 종소리처럼 헝클어진 내 정수리를 오래도록 씻어 내는군요

  당신이 달의 몸으로 내게 건너와

  서로에게 물들어 천천히 번진 첫 마음처럼

  조금씩 부풀어 오른 구월의 달리 곧 강물에 몸을 풀겠군요

 

-시집『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천년의시작, 2022) 수록

 

 


 

정연희 시인

충남 홍성에서 출생. 성신여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7년 《현대시학》을 통해 〈붉은 구상나무의 요술장갑〉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호랑거미 역사책』과 『불의 정원』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