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희 시인 / 금몽禁夢
어떤 꿈을 금지하는 걸까 칠 벗겨진 현판과 삐꺽대는 누마루 절집 연못에 연꽃 붉다 팔월의 달아오른 햇볕이 꽃 속으로 쏟아져 꽃방마다 불을 지폈다 꽃을 사랑하던 아버지 안마당에 꽃들이 병풍 자수처럼 고왔다 한여름에도 옷을 껴입은 아버지는 겹겹이 치마 두른 이국의 홍련과 같은 부족일까 아버지가 오랜 출타에서 돌아오셨는지 댓돌 위에 흰 고무신 가지런하다 처마 끝 햇살이 신발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아버지는 꿈을 내려놓지 못하고 가을볕 스러지듯 길을 재촉하셨다 그 후로 우리에게 누마루는 금기의 장소가 되었다
무릎에 앉히고 두상화를 가꾸듯 꿈을 쓰다듬으며 아가야 꽃처럼 자기만의 날개를 간직하거나 고니처럼 제 색깔을 가져야 하는구나 무거운 진흙 더미 생애를 꽃피우려던 아버지 나는 오랫동안 그 꿈에 미치지 못했다 금몽암에 아라홍련이 등불을 하나씩 켜고 있다
-시집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천년의시작, 2022) 수록
정연희 시인 / 탄생
상현달이 섬강에 얼굴을 씻는군요 씨앗을 품은 미완의 덩이 두 손으로 받아도 미어질 것 같군요 세 생명이 이 별에서 완성되는 내밀한 시간 월견초 따스한 기운이 밤의 한가운데로 모여들어 강변 풀섶이 온통 노란 붓 칠 소용돌이군요 당신은 허리 굽혀 미지의 세계를 기다리고 있군요 풀벌레들의 장엄 돌림노래 가까워졌다 멀어지는데 수도원 담장 너머 들리는 저녁 찬송과 어우러진 칸타타 밤 깊도록 이어지는군요 내 허물을 대신 깁는 기도일까요 맑은 종소리처럼 헝클어진 내 정수리를 오래도록 씻어 내는군요 당신이 달의 몸으로 내게 건너와 서로에게 물들어 천천히 번진 첫 마음처럼 조금씩 부풀어 오른 구월의 달리 곧 강물에 몸을 풀겠군요
-시집『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천년의시작, 2022) 수록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선환 시인 / 초점 외 2편 (0) | 2022.12.10 |
---|---|
정운희 시인 / 그냥 외 1편 (0) | 2022.12.10 |
안이숲 시인 / 사시의 눈 외 4편 (0) | 2022.12.10 |
한보경 시인 / 뒷덜미 외 1편 (0) | 2022.12.10 |
이인원 시인 / 낙타에게 외 1편 (0) | 2022.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