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안이숲 시인 / 사시의 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10.

안이숲 시인 / 사시의 눈

 

 

그곳엔 내가 없다

심장에 갇힌 한 마리 변온동물이었을 것이다

 

밤마다 꿈 한가운데가 부풀어 연한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 여행자의 직감으로,

그는 이불위에다 점 하나를 그려 넣었다

스케치가 완성되었을 때 머리털이 유독 새까만 내가 태어났다

엄마의 몸을 찢고 나온 나는

날갯짓하는 나비의 본성과, 중심이 자주 구부러지는 꼬리가 긴 뱀 사이를 번갈아 가며

잦은 가면놀이로 성장했다

 

은 눈빛도 붉은 흉강도 어느 것 하나 기우는 것 없는 줄의 팽팽함이 나를 키웠고

나를 살게 했다

죽음이란 무늬 속에 드리운 커튼과 같은 것, 아버지는 술래가 되어 금 밖의 세상으로 문을 닫았다

 

이제 나는 선 안쪽의 사람

당신은 선 바깥의 사람

 

막다른 비가 시작될 것 같은 하늘을 보며 슬픔은 젖은 습기라는 것을,

음지에서 피어난 꽃이란 것을,

꼭꼭 다지고 덮어서 둥글게 봉분을 쌓아올린 것이 슬픔의 높이란 걸 알게 되었다

봄비는 키 작은 생명들을 부지런히 들어 올리고

철없이 눈물이 많은 너는 조금씩 등이 구부러진다

 

주름진 생몰연대가 있다

그것은 찬란하기도 하였고, 변색렌즈를 끼운 안경을 하나 장만하였다

 

계간 『시와 경계』 2021년 여름호 발표

 

 


 

 

안이숲 시인 / 뿔소라의 감각

 

 

뼈를 바람벽으로 삼았어. 파도의 어원을 압축했어. 물결의 출렁거림은 같은 방향. 가라앉지 않고 집을 완성했어.

 

한발 내디디면 동종의 친구들이 많았어. 오늘은 타인이고 싶었어. 가까워서 나는 비린내가 싫었어. 빈 집은 점점 나선형이 되었어. 모두 비웠지만 모두 받아들인 한 채의 집.

 

뾰족한 것들은 빈 곳을 쳐다보고 있었어. 튀어나온 것들은 발화하고 싶은 흔적. 파고가 맹렬할수록 감추기 좋아. 한번쯤 발길질해도 파도 한 번이면 깨끗해졌어. 귀는 나선형의 입구에 있었어. 헤엄치던 소리들이 되돌아와 흔적을 남겼어. 그걸 사람들은 음악이라고 불러. 때로 초고음의 삑사리를 내고 싶었어. 발작의 원인이 뭘까. 어떤 증세를 떼어낸다면 결 고른 모래사장이 될 수 있어.

 

한 채의 집 속에 한 채의 고요가 들어 있어. 이것은 누가 선택한 것일까. 단편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 낮은 쪽으로 몸을 파고드는 집이 있어. 그걸 사람들은 너라고 불러.

 

움직이지 않고 다만 가만히 생각하고 있어. 생각 사이에 물결이 일고 있어. 그 위에 반달이 뜨고 있어. 반달이 빈 집으로 내려와 잠이 들어.

 

월간 『현대시』 2021년 11월호 발표

 

 


 

 

안이숲 시인 / 달팽이의 높이

 

 

바닥에 사는 일은 터무니없이 넓은 지상을 지켜내는 방식이야

 

느린 것은 한 생애를 반추하기 좋은 춤의 동작이지

품새를 익히지 않아도 골똘해지면

생각은 마른침으로 쓸고 가는 한나절을 꽉 붙잡고 놓지 않는다

 

먼지 떨어진 바닥을 닦으면서 등을 지킬 때

한 생애는 장엄한 것

쉽사리 놓을 수 없는 것

 

활짝 펴지기 전까지 그것은 다만 등짐일 뿐

무거움으로부터 그녀는 저편을 꿈꾼다

몸을 뒤집으면 종이비행기가 될 거라고 확신하는 오늘도

짠맛이 풍기는 쪽으로 몰래 웃음을 부려 놓고

 

삶을 뒷발로 차듯 스쳐가는 바람아

투명한 점액질로 날갯짓하지 않아도 바람의 길을 따라 하구에 닿을 수 있는 세계를,

공중에 떠서 가고픈 한 시절을 꾹꾹 짊어지고 가는구나

 

캄캄한 피부를 보여줄 수 없어 동그랗게 움츠려드는 오후

햇살이 집중 포격을 가해도

너는 펴짐줄을 제때 당기는 연습을 해야한다

어차피 유목민은 높이로 가는 꿈에 상처입지 않으므로

맨몸으로 밀고 나간다

 

바닥중의 바닥은 봉투보다 얇을까

 

햇빛을 실로 짜서 부채를 펼치듯 활짝 펼치고

마른 곡선의 댄스를 추리라고

 

오늘도,

뼈로만든 낙하산 하나 등에 업고 출근한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겨울호 발표

 

 


 

 

안이숲 시인 / 사과, 하고 싶습니다

 

 

사과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마트에서 당신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고 해서,

잘 진열된 뒤태에서 사과나무를 떠올렸어요

나무 아래서 맨살을 닿던 일

사과는 촉감이 너무 달콤했어요

아삭, 베어 물 때 귀에 닿는 소리가 구름의 곡선으로 흘러가곤 했죠

사과의 볼륨을 간직한 구름

 

부푼 설렘은 자칫 당도가 너무 높아요

소리내어 씹은 당신의 말에 충치가 생기곤 했죠

 

사과 껍질보다 붉은 우리의 한때는 사과가 자라나는 시간만큼의 딱 한때일 뿐이어서, 시간은 한쪽 귀퉁이부터 갈변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곪은 자국에서 썩은 냄새가 날 때, 우린 늦가을 이파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추락했어요

 

사과, 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덜컥 한입 베어 물고 뒷걸음질 쳤던 일

 

자주 설익은 나를, 사과꽃이 피는 속도보다 빠르게 사과하고 싶지만, 사과를준비하려면 마트가 문을 여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죠 푸른 새벽이 떠오르는 풋사과의 시간만큼 익혀야 해요

 

저쪽 언덕을 바라보는 사과나무가 있습니다.

광대뼈가 툭툭 불거진, 지금 내 나이와 똑같은 사과나무.

나무 아래 첫 사과의 기억이 사과처럼 붙어서 달랑거립니다.

 

기억이 사과보다 붉게 봄을 피워대는,

 

계간 『시와 경계』 2021년 여름호 발표

 

 


 

 

안이숲 시인 / 로션

 

 

친구는 나 보고 참 실속이 없다고 합니다

 

소문을 퍼 나를수록 나의 속은 조금씩 줄어들어요

아침저녁 밥 먹듯이 나를 덧바르는 여자들도 있지만

속부터 얇아져 오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피부에 집착하는 면이 있지요

 

그녀가 다시 나를 찾을 때까지

온종일 가만히 노래를 부르거나 바다를 생각합니다

민낯의 외출은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워요

무엇이든 바르지 않으면 금세 조개껍데기처럼 부슬부슬해져

가면은 벗겨지고 말지요

나는 민얼굴이거나, 하얗게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기도

겉모습에 사는 우리에게

골고루 발라주면 환한 표정을 고정시킬 수 있어요

적은 분량으로도 뜻밖의 자신감을 획득하게 됩니다

 

오늘 그녀가 나를 잔뜩 바르고 집을 나섭니다

고음의 구두가 또각또각 피아노를 치며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네요

 

외출을 즐기지만

나는, 여전히 무르거나 촉촉합니다

 

계간 『문학저널』 2022년 여름호 발표

 

 


 

안이숲 시인

경남 산청에서 출생. 2021년 계간 《사사사》를 통해 등단. 2021년 천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