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홍 시인 / 기원에 대하여
기원을 묻는다면 바이칼이거나 부리야트거나 어떤 동종 교배와 족내혼의 기원을 묻는다면 미토콘드리아와 핵을 넘어 세포 넘어 분자 넘어 기원을 찾는다면 차라리 폐호흡과 횡격막과 언어의 기원을 찾는다면 아니면 툰드라와 스텝과 열대우림 너머 냉혈의 대기권과 화성과 목성 너머 태양계와 은하계 너머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를 알지 못하는 그러므로 기원은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도 있을 필요가 없는 어떤 기원을 믿는다면 차라리 기원의 전체주의를 믿음의 전제적 폭력을 고발하기 위하여 이겨내기 위하여 넘어서기 위하여
-시집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김재홍 시인 / 라고 말할 수 없다
평생을 막일로 자식 셋 키워낸 어머니는 이제 늙어 쭈글쭈글한 육신에 그 영혼에 무수한 빗금이 칼날처럼 새겨져 라고 말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는 말이 아니라 언어 이전에 언표 바깥에서 평생을 막일로 어떤 잠재성도 가능성도 어떤 특이점도 변곡점도 없는 외삽의 필생을 사셨다 어머니의 연속성과 어머니의 항상성과 어머니의 필연성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리하여 운명이란 누가 시켜서 사는 게 아니라 버티며 살아내는 것이라는 표식을 온몸에 온 마음에 새겨놓았다 라고 말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시집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김재홍 시인 / 발산하는, 순간
허공을 향한 저 맹목적인 눈 벌어진 입 열린 몸으로 빈틈없이 스며드는 솟구치는 숨소리 극점을 향해 타오르는 목젖 끝에는 침묵이 어떤 정물과 평화와 심연이 유기적 연쇄를 끊은 출렁거리는 외로운 세포들의 적막의 한순간이 쏟아지는 사악한 반성의 한순간이 슬픔보다 빨리 슬픔보다 차갑게 슬픔보다 날카롭게 몰아치는 휘몰아치는 순간의 순간 시공의 굴절은 찢어진 분절은 휘어진 범주는 관점을 통곡을 발산하는 순간
-시집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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