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순자 시인 / 소년과 뱀과 소녀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6.

권순자 시인 / 소년과 뱀과 소녀를

 

 

소년과 뱀과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겁이 없었고

소녀는 겁이 많았다

 

햇볕에 탄 얼굴이 갈색으로 빛났다

뱀의 무늬가

머리카락을 물들였다

 

빛나는 머리털을 가진 소년과

무늬가 아름다운 뱀과

그 모든 것이 경이로운 소녀가 함께

 

더 까매진 눈동자를 품고

산길을 내려왔다

 

저녁연기가 뱀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시집 『소년과 뱀과 소녀를』에서

 

 


 

 

권순자 시인 / 골목길1

 

 

정릉 골목길을 걷는다

사라지기 전에 그리운 연인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마주하는 마음으로 걷는다.

 

나이 먹어 정감이 풀풀 나는 골목을

백열등 전등빛이 금빛으로 물들이는 밤

 

구수한 된장냄새

왁자지껄한 목소리마저 고요히

수채화 물감처럼 풀어진 길

 

술 몇 잔 걸친 걸걸한 목소리

곤히 잠든 밤

 

깃든 영혼을

그윽한 눈빛으로 품고 있다

 

구들을 데우느라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가

푸른 대문 앞에서

여린 달빛에

시간을 달구는 골목길을

 

아픈 발목을 끌며 천천히

정겨운 품안을 거닌다

조각달이 뿌옇게 어깨를 토닥인다

 

- 동인지 『달팽이 아파트』(시와여백2022) 발표

 

 


 

 

권순자 시인 / 사수의 하루

 

 

빌딩 청소부가

줄 끝에 몸을 싣고 허공을 누빈다

 

고독에 의지한 그의 등 뒤로

봄바람 가득히 눈부시고

버드나무 가지 연둣빛 박수 소리 청량하다

 

새들이 날개로 그림 그리는 동안

남자는 물줄기로 벽에 하루를 그린다

 

공중을 날아가는 노래들

먼지들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일상을 덮던 케케묵은 먼지들이

떠밀려가는 곳이 어디일까

 

바람을 타고 묵직한 하루를 씻어 낸

남자의 어깨는 가벼워져

여린 저녁 햇볕에

잘 마른 빨래처럼 흔들린다

 

<무크지양천문단> 2022 제22호 발표

 

 


 

 

권순자 시인 / 삐걱거림에 대하여

 

 

삐걱거리는 소리는 내가

살아있다는 표시

 

거칠게 미묘하게 스며들어

파장 일으키던 소리

 

삐걱거림이 연결하는 세계는

끊어질 듯 닿는 바람의 한숨!

짧은 꽃향기를 태우는 숨결이야

 

그늘에 숨겨도 모습을 드러내고야 마는

삐걱거림의 속성

깨어있을 때 통증으로 빛나는

살아있음의 몸짓

살아남을 기억

사라지지 않을 간절함

 

오므라들었다가 펼치는 꽃잎 사이의 계절처럼

구겨졌다가 펴는 허리 사이의 슬픔처럼

 

사이에는 무수한 삐걱거림이 있다

 

삐걱거림이 나를 세우고

나를 키운다

 

-시집 『소년과 뱀과 소녀를』(시인동네, 2022)수록

 

 


 

 

권순자 시인 / 야밤의 시인

 

 

밤이면 달그림자 따라 돈다

어둠 속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별빛이 번지는 길을 골라 사뿐거린다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줘

너는 날마다 모험을 하며 울고 있는 얼룩 같아

 

담을 넘듯 경계를 넘어

도달해야 하는 기쁨은 너무 높다

 

끝없이 밀려오는 지루한 상자들

도약과 탐색의 반복

땀범벅에 발목을 잡히지 않으려 안간힘이다

조용히 분투하는 너는

야밤의 시인

 

시월의 달밤을 잡아먹고

어둠의 파도가 머리칼을 흔들며 밤새 뒤척일 때

밤의 경계 넘어

날개 달린 짐승처럼 도약한다

 

돌을 던지든 꽃을 던지든

휘청거리는 다리를 추슬러 딛고

날렵하게 씩씩하게

 

-시집 『소년과 뱀과 소녀를』(시인동네, 2022)수록

 

 


 

권순자(權順慈) 시인

경주에서 출생. 1986년《포항문학》에「사루비아」외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심상》 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우목횟집』 『검은 늪』 『낭만적인 악수』 『붉은 꽃에 대한 명상』 『순례자』 『천개의 눈물』 『청춘 고래』 『소년과 뱀과 소녀를』 등이 있고, 시선집 『애인이 기다리는 저녁』 『Mother's Dawn』(『검은 늪』의 영역시집)이 있음.수필집 『사랑해요 고등어 씨』가 있음.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