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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재훈 시인 / 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6.

최재훈 시인 / 벽

 

 

거울이 없는 방에선 내가 종일 보이지 않는다

 

바닥을 기어가던 바퀴벌레 한 마리가

벽 앞에 주춤거리며 서 있다.

그도 잃어버린 게 있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시력을 잃은 형광등 불빛이 비틀거리다 벽에 부딪힌다.

몇 개의 낡은 가구들이 이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다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

가구 위에 놓여있던 몸을 나는 간신히 일으킨다.

텅 빈 몸통을 뚫고 뻗어 나온 다리가

잎사귀 같은 걸음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무례한 침입자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치 그곳에 질긴 목숨의 뿌리를 내린 것처럼.

검은 몸을 감싸며 반들거리고 있는 그의 정신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려다 그만둔다.

 

너의 몸은 누구의 눈에서 빠져나온 검은 눈동자인가.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저 섬뜩한 응시,

 

아니면 저 눈빛은 두려움에 떨며 어둠 속에 숨어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의심과 공포를 납작하게 밟아볼 텐가.

마침내 그의 가는 다리가 벽을 기어오른다.

뭔가에 쫓기듯 뒤를 연신 힐끔거리며.

깨진 구슬 같은 눈알이 나를 빠져나와 벽을 타고 그를 쫓아간다.

나는 네 생의 불안 어디까지 도망갈 텐가.

한참을 기어오르던 그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정신없이 벽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곤 벽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멍하니 벽 앞에 서 있다.

빈 벽을 쓰다듬는다.

벽이 출렁거린다.

 

다음날 나는 거울을 달기 위해

창백한 벽의 얼굴에 못을 박는다.

순간 그 안에서 물컹한 혓바닥들이

우글거리며 기어 나온다

 

 


 

 

최재훈 시인 / 265mm

 

 

엄지발가락이 휘고

새끼발가락이 구부러질 때까지

 

구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구두처럼 생각하고

구두처럼 울다가

 

맨발과 구두 사이가 헐거워질 때까지

헐거워지고도 한참을 더

구두처럼 살다가

 

드디어 맨발이 되어서

생각하지도 울지도 않는

착한 맨발이 되어서

 

휘어지지도 헐겁지도 않은

검은 구두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누워서 또각또각

 

천장을 가로질러 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구부러진 눈을 감으며

 

나와 맨발 사이가 헐거워질 때까지

헐거워지고도 한참을 더

맨발처럼 누워 있다가

 

매대 위에 맨발을 올려놓는

점원의 창백한 손을 바라보다가,

 

 


 

최재훈 시인

1971년 경남 김해 출생. 경북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2018년 계간《시산맥》등단. 제3회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 회사원(현재 제주 서귀포에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