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준 시인 / hertz whale
너희는, 오랫동안 나를 두고, 나의 언어를 두고, 독백이라고 했다. 진화가 덜된 목소리라고도 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해? 네가 사라져야 비로소 밤은 찾아왔다. 장국영이 죽고서야 벚꽃이 떨어졌듯이. 목소리를 묻어 버리는 목소리야말로 대낮처럼 폭력적이야. 대부분의 낮을 나는 열대우림의 나무처럼 얇은 목피 속에서 침묵하지. 끈끈하고 불쾌한 습도를 참아 내며 서 있어도 평범의 바깥에는 다른 평범함이 서 있을 뿐 내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어. 시청률과 조회 수와 판매량의 반대편으로 향하는, 내가 이상해? 주파수가 혼선된 해적 방송 같아? 단 한 번도 밤이 푸르지 않았던 너희는 아침의 채도를 몰라. 일조량에 따라 조건반사로 벌어지는 꽃송이처럼 떨어질 날들만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 나는 파미르의 이방인, 지극히 관조적이고 낯선. 너희는 나와의 교집합을 강요했지만 나는 합집합을 떠올리지. 단 한 번도 너희를 배제하지 않아. 하지만
아무도 들을 수 없어야 나는 마음껏 말할 수 있어. 내가 이상해?
서로 다른 부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심해의 생물이 되었으리. 시가 없 었다면 우리는 괴물이 되었으리. 수중의 두터운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나 의 울음은 아무도 들을 수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이해의 방식이 잘못되었던 거야. 내 신음과 웃음도 구별하지 못하던 당신들이… 내 소리만을 갖고 나를 이해하려 했던 잔인함이…
너희는 왜 알아듣기 싫은 말만 하는 걸까. 내가 이상한 거야? 일을 하다가 고개를 들면 말이야, 책상 칸막이 너머로 모조리 정수리만 보여. 그게 너무 무서워. 일종의 환공포증일까. 도대체 성실이라는 말 속에 울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성실은 착취의 풀메이크업 버전이야. 애국은 매국자가 선점해 버리고 진실은 위선자의 무기가 되고 있어. 오히려 거짓이라고 발음의 음장 속에 진실은 숨어 있어. 숫자와 탐욕이, 행간과 절실함이 서로 같은 헤르츠를 공유한다고 믿어. 이런 내가
이상해?
hertz whale: 일반 고래와 달리 52-hertz로 소리를 내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외톨이 고래. 내가 이상해?: 가수 이하이의 노래 중에서. ***
정창준 시인 / 루트, 시 한 편
폐허, 한 가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미처 챙기지 못했다기보다는 앞으로 소용없을 것 같아 버려둔 물건들만 고스란히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담 옆 공터에 서서 담배를 피우면서 주인이 있던 시절의 모습을 가만히 짚어 보는 시간을 좋아했다. 가족의 숫자와 가장의 직업과 초등학생용 공책과 책을 통해 학년과 성별을 짚어 보며 그들이 마주하고 앉았을 저녁이나 새어 나왔을 웃음들을 헤아려 보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흐르곤 했다./ 나는 "안채의 주인은 어둠이다"라는 이 시의 첫 구절 10자를 아주 좋아했다. 사실 이 시는 첫 구절만으로도 이미 좋은 시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첫 구절 이후에 이어지는 부분을 폄하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시의 첫 구절을 다양하게 바꾸는 놀이를 즐겨했다. 좀 일찍 자리에 누운 밤이면 "안채"를 다른 단어로, 또 "어둠"을 다른 단어로 그리고 "주인"을 여기에 어울리는 다른 단어로 바꾸다가 잠들면 잠 속에서도 단어를 이어 맞추는 놀이가 이어졌다./ 여기 한 편의 시가 있다. 한 채의 폐가를 오래 들여다보지 않은 자는 도저히 쓸 수 없는 한 편의 시가 있다. 사람이 빠져나간 집에서 버려진 물건은 주인이 될 수 없다. 오로지 온전히 안채를 지키고 앉은 어둠만이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폐허를 향해 흐르고 폐허 이후의 시간도 온전히 어둠만이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을 떠난 자들도 어딘가에서 다시 주인으로 살아가겠지만 '으깨어진'삶은 좀처럼 복원되기 힘들 것이다. /// 오랜 혼잣말은 그 스스로 종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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