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 시인 / 봄날의 허기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 나게 화사한 그 꽃잎들만 보이지요 아무것도,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그 눈부신 꽃잎들만 보이지요 하늘 아래 벚꽃과 나만 존재하는 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눈으로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지요 그러다 살짝 봄바람이 불어오면 그리운 화양연화의 빛가루처럼 흩날리는 그 꽃잎 하나하나가 강렬한 화염이 되어 온 가슴을 태우지요 그러면 어때요 매년 봄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 벚꽃에 마음 아무리 다쳐도 재가 되어도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 서면 그 상처 또한 아득한 봄날,최초의 꿈만 같아 아무리 덧없고 덧없어도 언제까지나 그 아래 서 있고 싶은걸요 손 쓸 수 없이 아름다운 몽유병자처럼 가이없이 그렇게
계간 『문학청춘』 2022년 여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호주머니에 민주주의를!
민주주의가 새고 있다 구멍투성이 체를 만나 줄줄 새고 있다 줄줄 샌 민주주의를 사람들이 즈려밟고 지나간다 짐승 발자국처럼 잔인하고 못생기고 욕심 많은 발들이 저 긴 인고의 세월과 피와 땀과 투쟁으로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신의 일부였던 그 낙원을 찢어져 바싹 마른 낙엽처럼 마구 즈려밟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민주주의는 풀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아무리 인간 아닌 짐승의 높이에서 즈려밟고 즈려밟아도 민주주의는 질경이처럼 푸른 잔디처럼 한겨울 보리처럼 즈려밟히고 밟히면서도 번식한다는 걸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내답압성(耐踏壓性)의 생명줄을 타고났다는 것을 아무리 구멍투성이 나쁜 체로 줄줄 흘려보내고 흘려보내도 민주주의는 그들보다 강하고 우리보다 더 강해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든 정원에서든 숲에서든 길에서든 철조망 안에서든 독재자의 밀실에서든 어디에서든 쑥쑥 다시 자라난다는 걸 그러니 아무리 나쁜 체를 만나 민주주의가 줄줄 새어 나가도 당신이 꿈속에서,혹은 깨어 있을 때,넘기는 책 속에서,길가 모퉁이를 돌 때 마주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어린아이가 태어나고 죽을 때… 어디에서든 민주주의를 만날 수 있다 어디에서 만나든 민주주의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당신을 도와주고 보호해줄 것이다 착한 양 떼는 물론 한 마리 잃은 양까지도 무사히 지켜내려는 든든한 사람처럼 그러니 어디에서든 민주주의를 발견하는 즉시 모두 당신의 호주머니에 넣으시길 민주주의를 자유롭게 키우고 널리 사랑으로 나눠주는 건 역시 당신의 힘, 태생이 민주주의자인 당신의 힘뿐이므로! 계간 『사이펀』 2022년 여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야생의 나라
나는 너의 충실한 개가 되고 싶었다. 너무나도 충실한. 무엇이든 주는 대로 먹고 지갑을 던지면 한 푼도 넘보지 않고 그대로 물어다 주고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달리라면 달리고 싶었다. 너를 보호자 삼아 한평생 섬기며 살고 싶었다. 하인학교라도 있으면 그곳에서 영원히 잘 받들어 모심!을 배우고 익혀 너의 최고의 충실한 개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그럼에도 나는 너의 충실한 개가 되지 못했다. 될 수가 없었다. 내 피와 내 혈통 때문이었다. 나는 늑대의 피와 혈통을 타고 난 야생.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 납작 엎드려 살려 했는데 어느 날,나는 네가 내 어린 새끼에게도 나처럼 굴종과 굴욕을 가르치기 위해 채찍과 폭력을 휘두르며 내 새끼를,그 어린 것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걸 보았다. 내 새끼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너에게 굴복하지 않으려 으르렁으르렁 대들고 있었다. 아,내 새끼!내 피와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내 새끼! 나는 그 숭고한 자유의지와 야생을 보는 순간, 요동치는 피와 함께 그대로 너에게 달려가 너를 물어뜯고 말았다. 그러곤 내 새끼를 품에 안고 산으로 산으로 달렸다 내 품에 안긴 내 새끼의 뜨거운 숨결이 여명이 밝아오는 저 먼 산의 깊은 숨결과 뒤섞여 억눌린 듯 잠자고 있던 내 피를 들끓게 하고 포효하게 했다. 미안하다,아들아! 이제는 우리의 나라,자유롭고 당당한 우리의 세계로 가자. 깊고 깊은 숲속,외롭고 높고 쓸쓸한*야생의 나라로!
*백석의 시에서 따옴. 계간 『사이펀』 2022년 여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부메랑 해독
선의로 한 일이 선의만 쏙 빼고 악의가 되어 되돌아올 때 그 씁쓰레하고 야비한 각도만 보아도 속이 울렁거린다 그럴 땐 꼭 물 두 잔을 마시길 한 잔은 가글용으로 한 잔은 배설용으로 물만큼 마음을 평정심으로 되돌려주는 건 없으니까
악의로 한 일이 악의만 쏙 빼고 선의가 되어 되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깨끗이 씻어내는 데엔 물 만한 게 없으니까
선의든 악의든 항상 중요한 건 동기지 결과는 아니다 결과는 각자의 이해충돌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부메랑 해독에 너무 공들이지 마라 백 퍼센트 선의나 악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왜 지구가23.5도로 기울어졌겠는가 모든 진실은 결과보다 동기에 더 많이 숨겨져 있고 그 두 언덕 사이를 야생마처럼 달리고 달려도 결국 바닷속으로,바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너와 내가 있을 뿐
모든 부메랑 해독은 언제나 신의 몫 신만이 대신 해줄 수 있다
계간 『문학청춘』 2022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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