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자 시인 / 검은 페도라 창 밖에 모자가 걸어가고 있다
모발을 위해 멋을 위해 썼지 눈빛을 가리기 위해 눌러 썼지 보고 싶지 않은 걸 보지 않으려 더 깊이 이 세계와 나의 담장으로서 더욱 깊이 치마 길이처럼 끌어내렸지
페도라가 움직인다 어? 페도라 속 저건 끈인가 아니, 발이네, 두 발 네 발 여덟까지 세었을 때 발들이 우다다다
그리마의 발들이 휘젓는 세계 바닥인지 식탁인지 천국인지 하수구인지 모른 채 머리 위에 무엇이 덮여있는지 모른 채 그리마는 자신이 돈벌레로 불리는 것도 모른 채 벌벌벌벌
죄를 짓기도 전에 죄인이라니 태어난 게 벌일까, 어깨가 무거워 페도라가 멈추자 앞의 발이 휘청 다음 발은 쓰러지고 그 다음 발은 무너지고 모자 속에 사람이 언제 이렇게 많아 졌나
무너진 사람 위에 사람이 무너지고 웅덩이를 만드는 빗방울처럼 돌로 채워버린 우물처럼 그 사이로 기어나오는 물줄기처럼
페도라 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팔은 주먹을 휘두르고 가슴은 모자의 세계를 더듬고 눈은 두리번거리며 여기는 왜 이리 어두운가
무너진 마음 위에 쌓이는 먼지의 마음처럼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모자 속인 줄도 잊은 채 발들은 우다다다다
창 밖에 커다란 검은 페도라가 날아간다
김유자 시인 / 왼발은 숲으로 오른발은 바다로
손을 넣고 휘휘 젓다가 발을 꺼낸다 두 발은 두리번거리다, 왼발은 숲으로 오른발은 바다로
귀를 꺼낸다 이것도 한 쌍이구나 열려 있어서 지킬 것이 없구나 두 귀가 다가가 붙어 서자, 나비가 된다 날갯짓할 때마다 파문이 일고
입을 꺼내자 윗입술은 떠오르고 아랫입술은 가라앉는다 구름인가 은하수인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윗입술은 우주를 떠가고 심해에서 지느러미를 흔드는 아랫입술 사이로 유성우가 흘러내린다 말들이 심해어의 눈처럼 흐려진다
무엇을 꺼내도 나로부터 달아나는
빛은 흩어져 있는 뼈와 심장과 귀들을 끌어당긴다 잠 깨면 바다와 사막과 행성 냄새가 난다 눈, 발, 가슴 한 쌍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손목과 손가락 종아리와 발목 입술과 혀는 붙어서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
-시집 <너와 나만 모르는 우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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