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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정 시인 / 피아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5.

김은정 시인 / 피아노

 

 

세상이 다 건반이네

자판도 건반

책꽂이도 건반

책 속의 활자들도 건반

그 뿐인가 바닷가 은모래 밭도 건반

솔가지 사이로 걷는 오솔길도 건반

나의 마음도 건반

당신의 마음도 건반

그래서 잘못 건드리면

예기치 않는 소리가 나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소리라고 나쁠 순 없어

건반을 잘 다스리는 사람

세상을 잘 연주하는 일이 중요해

가끔은 반음을 올리고

더러는 반음을 내리면서

얼룩말 무늬의 얼룩덜룩한 말들 데리고

한 옥타브 한 옥타브 아래 탕탕 평평 하는 일

낑낑거리면서 행복한 일

 

 


 

 

김은정 시인 / 황금 언덕의 시

 

 

한 여자가 걸어간다.

이 지상에 도착한 복잡한 하오의 표면을

자신의 하이힐 굽으로 똑 똑 똑 두드리고 있다.

 

거대한 성문처럼 지표가 열리고

그 내부에서 인디아나 존스의 발굴 같은

기적이 줄 줄 줄 나올 것 같은 예감이다.

 

겹겹의 우주가 쌓여 있는 층층의 신비주의

정령이 에워싸고 있는 이 세상의 핵 가운데 핵

씨앗처럼 그녀는 북두를 조금 빗겨 난 위치에서

사랑으로 가득한 두루마리, 그 영혼의 소슬 기둥

자주적으로 곧추선 시곗바늘처럼 움직이고 있다.

 

초가을 황금 언덕을 오르는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기념하는 한 그루의 신단수다.

에르메스 핸드백을 든 별자리 같기도 한 듯

지체 높게 나아갈 길을 걸어가는 백두의 사제다.

 

그녀의 진주산 비단 목도리가

그녀의 날개처럼 살아 펄럭인다.

 

비로소 찬란한

절정의 때를 만나고 있는 그녀의 숨결이

보란 듯 이 세상 정면 잠금장치를 푸는 시간

유서 깊은 파텍 필립의 침향을 더한다.

 

신림 같은 황금 언덕을 걸어가는 그녀

우주의 태극 원반 위에서 세수하고

탁족도 그리던 그 지문으로 맞은

행복한 오늘!

 

 


 

김은정 시인

경남 사천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졸업 및 同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1996년 '현대시학' 등단. 경상대학교에서 강의. 저서로는 시집으로 『너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일인분이 일인분에게』 『열일곱 살 아란야』 『황금 언덕의 시』. 학술서 『연암 박지원의 풍자정치학』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