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시인 / 피아노
세상이 다 건반이네 자판도 건반 책꽂이도 건반 책 속의 활자들도 건반 그 뿐인가 바닷가 은모래 밭도 건반 솔가지 사이로 걷는 오솔길도 건반 나의 마음도 건반 당신의 마음도 건반 그래서 잘못 건드리면 예기치 않는 소리가 나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소리라고 나쁠 순 없어 건반을 잘 다스리는 사람 세상을 잘 연주하는 일이 중요해 가끔은 반음을 올리고 더러는 반음을 내리면서 얼룩말 무늬의 얼룩덜룩한 말들 데리고 한 옥타브 한 옥타브 아래 탕탕 평평 하는 일 낑낑거리면서 행복한 일
김은정 시인 / 황금 언덕의 시
한 여자가 걸어간다. 이 지상에 도착한 복잡한 하오의 표면을 자신의 하이힐 굽으로 똑 똑 똑 두드리고 있다.
거대한 성문처럼 지표가 열리고 그 내부에서 인디아나 존스의 발굴 같은 기적이 줄 줄 줄 나올 것 같은 예감이다.
겹겹의 우주가 쌓여 있는 층층의 신비주의 정령이 에워싸고 있는 이 세상의 핵 가운데 핵 씨앗처럼 그녀는 북두를 조금 빗겨 난 위치에서 사랑으로 가득한 두루마리, 그 영혼의 소슬 기둥 자주적으로 곧추선 시곗바늘처럼 움직이고 있다.
초가을 황금 언덕을 오르는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기념하는 한 그루의 신단수다. 에르메스 핸드백을 든 별자리 같기도 한 듯 지체 높게 나아갈 길을 걸어가는 백두의 사제다.
그녀의 진주산 비단 목도리가 그녀의 날개처럼 살아 펄럭인다.
비로소 찬란한 절정의 때를 만나고 있는 그녀의 숨결이 보란 듯 이 세상 정면 잠금장치를 푸는 시간 유서 깊은 파텍 필립의 침향을 더한다.
신림 같은 황금 언덕을 걸어가는 그녀 우주의 태극 원반 위에서 세수하고 탁족도 그리던 그 지문으로 맞은 행복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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