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웅 시인 / 여름 비극
마음대로 안 되는 일들로 버티며 우리는 살아간다 장마가 끝나고 여기저기 물웅덩이를 그대로 둔 채 농도 짙은 폭염이 온 대지를 달궜다 아스팔트 냄새 짙은 열대야가 이어졌고 헐렁한 길을 따라 바람의 피부가 뿌옇게 일어났다 폭염의 자만심은 반응이 필요치 않았으므로 지상의 모든 감각은 조금씩 금지된다 우리는 입을 벌리고 침묵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세운다 딱딱한 대를 뚫고 나온 피가 엉기고 굳어 아름다운 응어리가 될 때까지 꽃은 제 이마를 허공에 찧으며 아픈 절정을 걷는다 이쪽 나무가 손을 저었을 때 저편 나무가 화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쪽 나무가 힘겨워하기 때문이다 폭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목을 옭아맨다 들판을 지나는 저녁 강물엔 물고기의 들뜬 입술들이 허영으로 껌벅거린다 이 폭염에 지치지 않는 건 떠돌이 뿐이다 그들은 휘갈겨 쓴 서명을 구겨 버리고 편안한 억압 대신 불편한 자유의 길거리로 나앉았다
박현웅 시인 / 대체로 희망적인 봄
봄은 왔는데 배부른 각시와 종아리가 여문 사내의 변두리 옥탑방은 언제 도배를 하나 홀쭉한 개나리는 담장에 기대어 축축 늘어지고 주저앉는 자리마다 궁색한 항문의 문신이 노랗게 찍히는 잎 갈기갈기 찢어진 민들레 쉬쉬 몸을 움츠리던 농부의 비구름은 황사바람에 메마른 기침만 하다 눈물만 찔끔, 목젖이 허옇게 드러난 앞강은 먼 산 돌 틈 사이 헝클어진 물줄기를 자으며 물레질 하는 옹달샘의 안부를 더 이상 송사리 떼에게 들려주지 못한다
손금 좋은 하얀 나비가 날면 구겨진 살림도 활짝 펴지겠지 기우뚱거리며 똥물 찍찍 갈기는 저 씨암탉 황금알을 줄줄이 낳을지도 모르고 세풍에 흩어진 자식들 그래도 누군가의 가슴에 날아들어 사랑의 문신을 새기며 가정을 이룰 테니, 지문 같은 논밭 둑이 다 닳도록 오가다보면 출렁이는 곡식들이 허리를 잡고 덩실 춤추는 계절도 오겠지 송사리 떼 이제 너희들의 지느러미로 강물을 지휘하라 황홀한 가락으로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비가 온단다 꽃이 핀단다
- 시집〈첫 만남은 아련한데〉국보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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