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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상미 시인 / 봄날의 허기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6.

김상미 시인 / 봄날의 허기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 나게 화사한 그 꽃잎들만 보이지요

아무것도,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그 눈부신 꽃잎들만 보이지요

하늘 아래 벚꽃과 나만 존재하는 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눈으로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지요

그러다 살짝 봄바람이 불어오면

그리운 화양연화의 빛가루처럼 흩날리는 그 꽃잎 하나하나가

강렬한 화염이 되어 온 가슴을 태우지요

그러면 어때요

매년 봄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 벚꽃에

마음 아무리 다쳐도 재가 되어도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 서면

그 상처 또한 아득한 봄날,최초의 꿈만 같아

아무리 덧없고 덧없어도

언제까지나 그 아래 서 있고 싶은걸요

손 쓸 수 없이 아름다운 몽유병자처럼

가이없이 그렇게

 

계간 『문학청춘』 2022년 여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호주머니에 민주주의를!

 

 

민주주의가 새고 있다

구멍투성이 체를 만나 줄줄 새고 있다

줄줄 샌 민주주의를 사람들이 즈려밟고 지나간다

짐승 발자국처럼 잔인하고 못생기고 욕심 많은 발들이

저 긴 인고의 세월과 피와 땀과 투쟁으로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신의 일부였던 그 낙원을

찢어져 바싹 마른 낙엽처럼 마구 즈려밟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민주주의는 풀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아무리 인간 아닌 짐승의 높이에서 즈려밟고 즈려밟아도

민주주의는 질경이처럼 푸른 잔디처럼 한겨울 보리처럼

즈려밟히고 밟히면서도 번식한다는 걸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내답압성(耐踏壓性)의 생명줄을 타고났다는 것을

아무리 구멍투성이 나쁜 체로 줄줄 흘려보내고 흘려보내도

민주주의는 그들보다 강하고 우리보다 더 강해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든 정원에서든 숲에서든 길에서든 철조망 안에서든 독재자의 밀실에서든

어디에서든 쑥쑥 다시 자라난다는 걸

그러니 아무리 나쁜 체를 만나 민주주의가 줄줄 새어 나가도

당신이 꿈속에서,혹은 깨어 있을 때,넘기는 책 속에서,길가 모퉁이를 돌 때 마주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어린아이가 태어나고 죽을 때…

어디에서든 민주주의를 만날 수 있다

어디에서 만나든 민주주의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당신을 도와주고 보호해줄 것이다

착한 양 떼는 물론 한 마리 잃은 양까지도 무사히 지켜내려는 든든한 사람처럼

그러니 어디에서든 민주주의를 발견하는 즉시 모두 당신의 호주머니에 넣으시길

민주주의를 자유롭게 키우고 널리 사랑으로 나눠주는 건 역시 당신의 힘,

태생이 민주주의자인 당신의 힘뿐이므로!

계간 『사이펀』 2022년 여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야생의 나라

 

 

나는 너의 충실한 개가 되고 싶었다.

너무나도 충실한.

무엇이든 주는 대로 먹고 지갑을 던지면 한 푼도 넘보지 않고 그대로 물어다 주고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달리라면 달리고 싶었다.

너를 보호자 삼아 한평생 섬기며 살고 싶었다.

하인학교라도 있으면 그곳에서 영원히 잘 받들어 모심!을 배우고 익혀

너의 최고의 충실한 개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그럼에도 나는 너의 충실한 개가 되지 못했다.

될 수가 없었다.

내 피와 내 혈통 때문이었다.

나는 늑대의 피와 혈통을 타고 난 야생.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 납작 엎드려 살려 했는데

어느 날,나는 네가 내 어린 새끼에게도 나처럼 굴종과 굴욕을 가르치기 위해

채찍과 폭력을 휘두르며 내 새끼를,그 어린 것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걸 보았다.

내 새끼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너에게 굴복하지 않으려

으르렁으르렁 대들고 있었다.

아,내 새끼!내 피와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내 새끼!

나는 그 숭고한 자유의지와 야생을 보는 순간,

요동치는 피와 함께 그대로 너에게 달려가 너를 물어뜯고 말았다.

그러곤 내 새끼를 품에 안고 산으로 산으로 달렸다

내 품에 안긴 내 새끼의 뜨거운 숨결이

여명이 밝아오는 저 먼 산의 깊은 숨결과 뒤섞여

억눌린 듯 잠자고 있던 내 피를 들끓게 하고 포효하게 했다.

미안하다,아들아!

이제는 우리의 나라,자유롭고 당당한 우리의 세계로 가자.

깊고 깊은 숲속,외롭고 높고 쓸쓸한*야생의 나라로!

 

*백석의 시에서 따옴.

계간 『사이펀』 2022년 여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부메랑 해독

 

 

선의로 한 일이 선의만 쏙 빼고

악의가 되어 되돌아올 때

그 씁쓰레하고 야비한 각도만 보아도 속이 울렁거린다

그럴 땐 꼭 물 두 잔을 마시길

한 잔은 가글용으로

한 잔은 배설용으로

물만큼 마음을 평정심으로 되돌려주는 건 없으니까

 

악의로 한 일이 악의만 쏙 빼고

선의가 되어 되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깨끗이 씻어내는 데엔

물 만한 게 없으니까

 

선의든 악의든 항상 중요한 건 동기지 결과는 아니다

결과는 각자의 이해충돌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부메랑 해독에 너무 공들이지 마라

백 퍼센트 선의나 악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왜 지구가23.5도로 기울어졌겠는가

모든 진실은 결과보다 동기에 더 많이 숨겨져 있고

그 두 언덕 사이를 야생마처럼 달리고 달려도

결국 바닷속으로,바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너와 내가 있을 뿐

 

모든 부메랑 해독은 언제나 신의 몫

신만이 대신 해줄 수 있다

 

계간 『문학청춘』 2022년 여름호 발표

 

 


 

김상미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와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 등이 있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