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시인 / 그늘 봄이 되어도 마당의 철쭉이 피지 않는다 집을 팔고 이사 가자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꽃의 그늘을 내가 흔든 것이다 몸이 있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아내는 집이 좁으니 책을 버리자고 한다 그동안 집을 너무 믿었다 그들은 내가 갈 데가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옛 시인들은 아내를 버렸을 것이나 저 문자들의 경멸을 뒤집어쓰며 나는 나의 그늘을 버렸다 나도 한때는 꽃그늘에 앉아 서정시를 쓰기도 했으나 나의 시에는 먼 데가 없었다 이 집에 너무 오래 살았다 머잖아 집은 나를 모른다 할 것이고 철쭉은 꽃을 버리더라도 마당을 지킬 것이다 언젠가 모르는 집에 말을 매고 싶다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 2016
이상국 시인 / 못을 메우다
마당에 손바닥만 한 못을 파고 연(蓮) 두어 뿌리를 넣었다 그 그늘에 개구리가 알을 슬어놓고 봄밤 꽈리를 씹듯 울었다 가끔 참새가 와 멱을 감았다 소금쟁이와 물방개도 집을 지었다 밤으로 달이나 별이 손님처럼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다 날이 더워지자 개구리를 사랑하는 뱀도 슬그머니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와 마주친 아내가 기겁을 한 뒤로 장에 나가 개 한마리를 구해다 밤낮으로 보초를 서게 했다 그사이 연은 막무가내 피고 졌다 마당이 더는 불미(不美)하지 않았으나 마을에 젊은 암캐가 왔다는 소문이 나자 수컷들이 몰려들어 껄떡대는 바람에 삼이웃이 불편해했고 어쩌다 사날씩 집을 비울 때면 그의 밥걱정을 해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못을 메워버렸다 마당에 평화가 왔다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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