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서정춘 시인 / 동행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5.

서정춘 시인 / 동행

 

 

물돌물 돌물돌

물이 흘러갑니다

 

함께 가자

함께 가자

 

어린 물이 어르며

어린 돌을 데리고 흘러갑니다

 

모래무덤 끝으로

그리움으로

 

 


 

 

서정춘 시인 / 봄날

 

 

나여

푸르러 맑은 날과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죽기에도 좋은 날

이런 날은 산불 같은

꽃상여 좀 타봤으면

 

 


 

 

서정춘 시인 / 30년 전

-1959년 겨울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서정춘 시인 / 종소리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 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서정춘 시인 / 저수지에서 생긴 일 2

 

 

 어느 날 저수지 낚시터엘 갔었더랍니다 처음에는 저수지 물이 아주 잔잔해서 마치 잘 닦인 거울 속 마음 같아 보였는데 거기다가 길게 날숨 쉬듯 낚싯줄을 드리웠는데 때마침 저수지 물이 심각하게 들숨 날숨으로 술렁거렸고 난데없는 왜가리의 울음방울 소리엔 듯 화들짝 놀란 물고기가 저수지 전체를 들어 올렸다가 풍덩풍덩 놓쳐버렸기 때문에 나 역시 낚싯줄에 간신히 걸린 한 무게를 깜짝깜짝 놓쳐버릴 수밖에 없었더랍니다 그러자 저수지 물은 다시 잔잔해졌고 아 이렇게 한순간에 일어난 "긴장감 속에 깃든 평화"를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아직 맛본 일이 없었더랍니다

 

 


 

서정춘 시인

1941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 매산고등학교를 졸업.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는 등단 28년만에 발표한 <죽편>과 <봄, 파르티잔>에 이어 <귀> <물방울은 즐겁다> <캘린더 호수>가 있다. 2001년 박용래문학상. 2004년 제1회 순천문학상 수상. 최계락문학상, 유심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