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시인 / 기왕
기왕이라는 왕 있었네 슬픈 왕이 있었네
이래도 저래도 슬플 뿐인 거였다면 그 세월 나랑 기쁘고 나하고 슬프지
어차피 빈 배로 갈 거 같았으면 먼지같이 가볍게 그늘같이 숨어 있을 나 태워, 없는 듯 가지 나를 좀 데려가지 한겨울 마음만 남아 눕지도 못하는 마른 풀처럼 외로울 거면 나하고 외롭지 곧 녹을 숫눈과 같이 사랑할 거면 나랑 하지
그도 저도 아니면 징표라도 주고 가지 어느 날 아무 때 목줄 하나 주고나 가지
나와는 멀고 먼 폭군 기왕이라는 왕이 있었지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7월호
김수환 시인 / 문장이 아니었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그 집 담장 해바라기가 해바라기가 아닌 때, 즐거운 피크닉이었지만 피크닉도 아닌 날
구름은 액자보다 못한 때도 있었다 울음 같은 기타는 기타가 아니었고 그런 날 투항의 편지는 편지가 아니었다
나와 너는 넘치고 목적어가 없는 수줍고 어설픈 손짓 같은 말들은 문장이 아니었지만 문장이었다 나만 아는
-<수국이 세 번 피고 세 번 지는 동안> (영언동인 제9집)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인숙 시인 / 1945, 그리운 바타비아 (0) | 2023.01.28 |
---|---|
최은진 시인 / 미로 일기 외 2편 (0) | 2023.01.28 |
박해석 시인 / 첫눈에 외 2편 (0) | 2023.01.28 |
최휘 시인 / 호두 혹은 화두 외 1편 (0) | 2023.01.28 |
허민 시인 / 너에게 외 1편 (0) | 2023.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