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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수환 시인 / 기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8.

김수환 시인 / 기왕

 

 

기왕이라는 왕 있었네

슬픈 왕이 있었네

 

이래도 저래도 슬플 뿐인 거였다면

그 세월 나랑 기쁘고 나하고 슬프지

 

어차피 빈 배로 갈 거 같았으면

먼지같이 가볍게 그늘같이 숨어 있을

나 태워, 없는 듯 가지 나를 좀 데려가지

한겨울 마음만 남아 눕지도 못하는

마른 풀처럼 외로울 거면 나하고 외롭지

곧 녹을 숫눈과 같이 사랑할 거면 나랑 하지

 

그도 저도 아니면 징표라도 주고 가지

어느 날 아무 때 목줄 하나 주고나 가지

 

나와는 멀고 먼 폭군

기왕이라는 왕이 있었지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7월호

 

 


 

 

김수환 시인 / 문장이 아니었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그 집 담장 해바라기가 해바라기가 아닌 때,

즐거운 피크닉이었지만 피크닉도 아닌 날

 

구름은 액자보다 못한 때도 있었다

울음 같은 기타는 기타가 아니었고

그런 날 투항의 편지는 편지가 아니었다

 

나와 너는 넘치고 목적어가 없는

수줍고 어설픈 손짓 같은 말들은

문장이 아니었지만 문장이었다 나만 아는

 

-<수국이 세 번 피고 세 번 지는 동안> (영언동인 제9집)

 

 


 

김수환 시인

1963년 경남 함안 출생. 2013년 《시조시학》 신인상,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