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은진 시인 / 미로 일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8.

최은진 시인 / 미로 일기

 

 

오늘 내가 쓰고 있는 건

어제 일기인가 내일 일기인가

자전하는 지구처럼 미로정원을 헤맬 때

우리가 가진 얼굴은

감옥 안에서의 자유로움같은 표정을 만들었지

 

혀밑에 자라난 돌기를 아픈 줄 알면서도

자꾸 혀끝으로 찔러보는 습관처럼

방향도 없이 제멋대로 자라난 욕망으로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그 안으로 우리, 손잡고 들어가자

고백을 앞둔 사람처럼

허기로 가득 찬 얼굴

가둘 수 없는 얼굴로

감금된 자유를 찾아 헤매지

어제의 길을 삭제해 버린 밤을 지나

하늘이 뒤집어져 구토가 날 때까지

어지러워지기 위해

 

우리가 보게 될 마지막 얼굴을 본 적 있니

매듭풀린 풍선처럼

사방으로 날아다니다 쪼그라든 채

어느 구석으로 처박히고 마는

 

얼굴을 잃어버린 오늘

내일 일기가 될지도 모를

어제 일기를

꾹꾹 눌러 담는데

예보도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에 놀라

미로를 뒤집어서 털자

하늘로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얼굴 얼굴 얼굴들

 

 


 

 

최은진 시인 / 수박처럼 여름이

 

 

발꿈치를 최대한 들었다

희망이 돋아날 것 같아서

 

세상은 알고 우리만 모르는 불가능과

세상은 모르고 우리만 아는 가능 사이에서

 

찬란한 푸름 속에 핏빛 속살 감춰 둔

여름을

반으로 자르자

빨간 감정이 칼을 타고 흘러내려

나무도마에 스며들었다

 

도움닫기만 하다 끝나버릴 감정들

 

과즙이 뚝뚝 흐르는 수박이 목이 메는 이유는 뭘까

 

검푸른 껍질 속에서 밤마다 숨어 앓다가

스스로 가슴에 생채기 내어

붉어졌을 여름,

며칠째 이어지는 장마에도

늘 목이 탔다

 

출발선 앞에 멈춰서버린 멀리뛰기 선수처럼

수박먹은 뒤 마시는 물처럼

싱거워질 감정들,

아직은 붉은데

 

세상은 모르고 우리만 알았던 희망이

세상 모두가 알고 우리만 몰랐던 절망임을

마침내 우리가 알게 된 순간

여름은 끝이 난다

 

끝물 과일의 밍밍함을 알면서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9900원 특가세일 수박

무거울지 가벼울지 저울질하다

끝나버릴 여름이

수박처럼 익어갈 때

지금은 빨간 감정 밴 도마를

햇빛에 말려야 할 시간

 

 


 

 

최은진 시인 / 가위눌린 가위가

 

 

손가락을 다 펴지 마

왼손잡이였던 내가 오른손을 쓰게 된 후에도

남아있는 습관들

어떻게든 잠에 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갓난아이처럼

누군가 나를 건드려 줄때까지

움직일 수 없는‘얼음땡’처럼

 

눌러도 눌러도

한방울도 새어나가지 않는 악몽이

검은 이불로 덮어져 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낡은 푯말이 지키는

미해결사건 범죄 현장처럼

 

젖은 이불은 밤이 새도록

현실이 꿈으로, 꿈이 현실로 환원되는 악몽을 되풀이하고

 

손가락을 두 개만 펴고

악몽을 건드려 봐

어둠이 움찔거리기 시작하면

무거운 이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지도 몰라

낮이 밤이 되려는 건지 밤이 낮으로 가려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이 번지는 어둠이

감은 눈 안으로 들어오고

억눌린 기분을 잘라내야

여길 빠져나갈 수 있어

 

사막 위를 날아다니는 고래처럼

젖은 몸으로 건조한 밤을 뒤척일 때

의문은 의문을 낳지

야누스가 지키는 저 문으로

내가 들어갔을까 그녀가 나왔을까

모든 문장 끝엔

가위눌린 의문기호가 새겨지고

 

-[서정시학] 신인상 수상작

 

 


 

최은진 시인

1974년 부산 보수동 출생. 대학에서 컴퓨터공학 전공. 2017년 한올문학 시 부문 등단. 2019년 계간 《서정시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나주지부 회원. 나주문인협회 회원. 시집 <조금은 쓸쓸한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