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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장욱 시인 / 극적인 삶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3.

이장욱 시인 / 극적인 삶

 

 

막이 내려올 때는 조용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후의 해변이나

노인의 뒷모습 또는

혼자 깨어난 새벽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이었다

요한의 복을 원하는 살로메였고

숲을 헤매는 빨치산이었다

세일즈맨이 되어 핀 조명이 떨어지는 무대에서

독백을

 

여러분, 인생에는 기승천결이 없다

코가 큰 시라노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빨간 모자를 쓴 늑대는 밤마다 문을 두드리고

맥베스는 예언에 따라 죽어가는 것

 

추억에 잠겨 혁명을 회고하는자들은 이미

혁명의 적이 된 자들이지.

겨울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영구 미제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벌판을 떠돌겠지요.

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드라마틱한 삶이란 출장 일과 시간짜리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인데

카라마조프는 검은 피와 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인데

인형의 집에시는 드디어 노라가 뛰쳐나오고

에쿠우스의 주인공은 사신의 눈을 찌르며 외진다.

머리가 열 개인 말들이여, 눈이 백 개인 말들이여, 반인반마의 신들이여!

 

붉은 막이 등 뒤로 내려오자

나는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깊이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객석의 어둠 속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살인자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장욱 시인 / 은행 앞 네거리에서 질문의 없음

 

 

당신은 거기서 왜 혼잣말을 했다.

자동차들은 어째서 자꾸 경적을 울렸다.

밤마다 구름의 자리에서 당신이 어떻게 잠들었는데

낮에는 횡단보도가 없는 길로 나아가 어디로 걸어갔는데

은행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대체 무엇을 요구했는데,

당신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가까웠다.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친근해졌다.

우리는 국민체조를 하고 산수를 배우고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의 머나먼 어디로 떠났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불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만

의혹들은 언제부터 확신의 형태로 자라납니다만

질문이란 왜 형식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을 텅 비어 있지 않은 것으로 채우기

그런 것이 어째서 우리의 일생이었던 것입니다.

체조를 할 때는 팔 다리를 가장 멀리 휘두르기로 하자.

대화를 할 때는 초과량의 욕설을 사용하기로 하자.

당신은 어째서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을 향하여

당신은 은행 앞 도로 한복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대체 무엇을 요구했다.

아주 명료한 곳에서 당신과 나는 왜

 

 


 

이장욱 시인

1968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노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4년 《현대문학》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등이 있고, 평론집 『혁명과 모더니즘』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가 있음.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 수상. 현재 〈천몽〉 동인.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