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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빈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3.

최하림 시인 / 빈집

 

 

초저녁, 눈발 뿌리는 소리가 들려

유리창으로 갔더니 비봉산 소나무들이

어둡게 손을 흔들고 강물 소리도 숨을 죽인다

나도 숨을 죽이고 본다 검은 새들이

강심에서 올라와 북쪽으로 날아가고

한두 마리는 처져 두리번거리다가

빈집을 찾아 들어간다 마을에는

빈집들이 늘어서 있다 올해도 벌써

몇 번째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집들이 지붕이 기울고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검은 새들은 지붕으로 곳간으로 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새들은 빈집에서

꿈을 꾸었다 검은 새들은 어떤

시간을 보았다 새들은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들어갔다

새들은 은빛 가지 위에 앉고

가지 위로 날아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들며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울었다

아아 해빙기 같은 소리 들으며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다

검은 새들이 은빛 가지 위에서 날고

눈이 내리고 달도 별도 멀어져간다

밤이 숨 쉬는 소리만이 눈발처럼 크게

울린다

 


 

최하림 시인 / 가을 날에는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넓은 들을 돌아다니는

 

가을날에는 요란하게 반응하며 소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컨대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 풀들이 놀래어 소리한다 소리물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맘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하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최하림 시인(崔夏林,1939~2010)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본명:최호남).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조연현 문학상, 이상문학상(1999),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향년 7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