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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선희 시인 / 바퀴 달린 가죽가방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4.

이선희 시인 / 바퀴 달린 가죽가방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

무엇을 쑤셔 넣으면 한없이 들어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비뚤어지게 서 있는 것이

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

울퉁불퉁 늘어진 것이

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

바퀴 달린 가죽가방

 

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르는 채

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며

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손들고 서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이선희 시인 / 현관의 ㅃ센서 등

 

 

반경 안에서 움직이는 것들에만 반응하는 습성이 있다

반경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에 의해서만 밝아진다

 

더러는 헛것으로 밝아지기도 하고

가끔은 착각으로 밝아지기도 한다

 

반경 안에 들어와 팔을 휘젓는 물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필요 없이 반응하거나 너무 늦은 반응으로 자주 의심을 산다

 

혼자 켜지고 꺼진다

울다가 웃는다 혼자

 

좀처럼 반경 안으로 들어서려 하지 않는 물체를 기다린다

오래전부터 준비 완료 상태로 어둠 속에서 늙고 있다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이선희 시인 / 비석

 

 

회원카드 신용카드 대출카드로

흥청망청 재미나게 살았다

 

어느 날 옐로카드 레드카드가

그를 낭떠러지로 밀어붙였다

 

이제 술과 꽃과 음식이 자동으로

배달되는 검은 카드 한 장 앞에 꽂았다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이선희 시인 / 박태기

 

 

삶을 막 패대기쳤을 것 같은 박태기는

굵은 근육도 없고 키도 작으면서

성질만 불같은 남자네

 

커다란 그늘이 있는 나무가 아니네

사철 푸른 나무도 아니네

 

하트 모양 잎사귀가 달리는

넉넉한 사랑이 가득한 나무네

 

그를 위해 밥을 하고

그를 위해 꽃이 되고 싶네

 

그의 몸에 달라붙어 간지럼을 태우다가

주렁주렁 그의 열매를 낳고 싶네

 

그의 하트 잎사귀가 커지면

그 속에 아예 들어가 살고 싶네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이선희 시인 / 참외의 조건

 

 

각이 있거나 볼품없이 길쭉하지 않다

너무 둥글지 않아 쉽게 굴러다니지도 않는다

 

얇고 매끈한 껍질 벗겨 먹기가 쉽다

그렇지만 자기 빛깔은 분명하다

 

적당히 작아 만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속에 많은 씨앗도 있다

쉽게 상하지 않을 근육은 두툼하다

 

알고 보면 내면에 여백도 있어

너무 진하지 않게 향기도 낼 줄 안다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이선희 시인 / 장미의 의도

 

 

가시 하나쯤 달고 펼쳐진 길 묵묵히 걸어가는 줄기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짓이겨지지 않고 한 철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억센 이파리로 살고자 했을 것이다

어쩌다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얼굴 쑥스러웠을 것이다

고된 노동의 냄새를 숨기려 엉뚱한 향수를 뿌리고 한참을 휘청거렸을 것이다

자꾸 의도에서 벗어나는 삶에 무던히도 온몸을 흔들었을 것이다

색깔을 바꾸어가며 살랑대는 뻔뻔한 얼굴이 만발했을 때였을 것이다

믿는 구석이나 되어주자고 줄기와 이파리는 더 진해지고 더 굵어졌을 것이다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이선희 시인 / 파

 

 

대충 토막 쳐져 국물만 빼내도 그만이다

송송 썰려 당신에게 스며들다가

어슷어슷 썰려

누구의 보색으로 살아도 그만이다

메인으로 매운맛을 내며

종종 따끔한 쓴맛도 보여주고

뒷맛은 의외의 단맛으로 갈무리하고 싶다

뿌리 자르고, 누런 잎 떼어내고

손과 발 깨끗하게 씻고 나선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서슬 푸른 줄기

진액 농도로 잘릴지언정 허리 굽히지 않는다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이선희 시인 / 환생하는 꿈

 

 

저승에는 문이 두 개 있었다

일반으로 들어가는 문과 시인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죽어서도 시인인 것을 기뻐하며 시인의 문으로 들어갔다

문 안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부유해 보이는 세상이 있었다

사람들은 천천히 산책하고 먼 곳을 보며

움직임도 이야기도 조용조용했다

익숙한 모습의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기형도 시인이 잠시 바라보았지만 인사를 못 했다

서정주 시인도 저쪽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고

천상병 시인의 웃는 모습도 보였다

머뭇거리는데 윤동주 시인이 다가왔다

주변을 둘러보며 여기는 시인들의 세상이라고 했다

전생에서 쓴 시가 이곳에서는 재산이라고 했다

꿈인지 망상인지 문득 깨어나니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다

아직 나는 이 세상에 있었다

써 놓은 시가 부족해서 뒤돌아온 것만 같았다

이생에서 슬프고 외롭게 시를 쓰는 일이 복을 쌓는 일 같았다.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수록

 

 


 

 

이선희 시인 / 쌀의 일생

 

 

앙증맞은 크기가 적당하게 통통하고

반질반질 잘 여물었다

한 자루에 모아 담고 얼싸 추켜 주었다

 

분가루를 뒤집어쓴 채

기다리는 자세는 배우지 않고도 알았다

 

가마니 속에서 으뜸이 되기도 했으므로

시원한 그늘 속에서 일생 하얗게 웃을 줄 알았다

 

세상의 손바닥에 올려지자

주르륵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렸다

 

불빛 아래 억센 손에 의해 박박 시달렸다

더 뜨거운 맛을 봐야 하는

환골탈태의 과정은 짐작도 못했다

 

불려 들어간 물속에서 타닥타닥

대책 없던 대책 회의

 

눈은 있으나 앞은 볼 수 없었다

자주 뭇 잡곡에 섞이며 희미해져 갔다

 

-시집 『환생하는 꿈』(지혜, 2022) 수록

 

 


 

 

이선희 시인 / 함정에 빠진 소

 

 

내 것도 남의 것도 아닌 코뚜레가 방향을 잡는다

얼기설기 늘어진 고삐들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늙어가는 누런 몸뚱이에 진딧물과

쫓아도 다시 윙윙대며 달라붙는 똥파리들이 늘어간다

 

질질 끌려다니는 이 고랑들

등이 굽도록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생활이다

 

세상의 구멍들 너무 작아

아무리 커다랗게 눈을 굴려 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매일매일 새로운 등 뒤의 채찍질, 도망은 생각도 않는다

후회와 뒷북과 걱정들로 되새김질을 하는 버릇이 있다

 

거친 먹거리로 몸집만 커진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한 곳에서 먹고 싸고 눕는다

 

시집『환생하는 꿈』(지혜, 2022) 수록

 


 

이선희 시인

충남 공주에서 출생. 2007년《시와 경계》로 등단. 시집으로『우린 서로 난간이다』, 『소금의 밑바닥』, 『환생하는 꿈』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