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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규 시인 / 미간(眉間)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3.

이은규 시인 / 미간(眉間)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이라 부르는 곳에 눈이 하나 더 있다면

나무와 나무 사이

고인 그늘에 햇빛 한 줄기 허공의 뼈로 서 있을 것

 

최초의 방랑은 그 눈을 心眼이라 불렀다

왜 떠도는 발자국들은 그늘만 골라 디딜까

나무 그늘 아래 당신의 미간 사이로 자라던 허공의 뼈

 

먼 눈빛보다 미간이 좋아

바라보며 서성이는 동안 모든 꽃이 오고, 간다

 

나무가 편애하는 건 꽃이 아니라 허공

허공의 뼈가 흔들릴 때 나무는 더 이상 직립이 아니다

그늘마다 떠도는 발자국이 길고

 

뒤돌아보는 꽃처럼 도착한 안부, 어느 마음의 投擲이 당신의 心眼을 깨뜨렸다는 것 돌멩이가 나뭇잎 한 장의 무게도 안 되더라는 위로는 사흘 지나 끝났다 온전한 무게에 터진 미간의 기억이 치명적이었다는 소견, 왜 미간의 다른 이름은 命宮일까

 

사람들이 검은 액자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화염의 칼날이 깨끗이 발라 낸 몸, 뼈가 아직 따뜻한데

직립을 잃은 허공이 연기가 되고 있다

눈인사 없이 떠난

당신이 나무로 태어날 거라고 믿지 않는 봄날

 

投擲의 자리엔 햇빛의 무늬가 밀려가고, 밀려오고

 

 


 

 

이은규 시인 / 조각보를 짓다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 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 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 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 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 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현빈지문(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국제신문」(2006. 1. 1)

 

 


 

이은규 시인

1978년 서울에서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학위. 문학박사. 2006년 국제신문, 2008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다정한 호칭』(문학동네, 2012)과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문학동네, 2019)가 있음. 김춘수문학상, 현대시학 작품상, 계간 <시와 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