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성 시인 / 느티나무 룽다
불이 지나간 자리가 차다
그을음이 울음으로 읽히는 석조대좌에 바람과 구름이 빚어내는 이끼꽃이 뒤덮여 있다 불길이 지나간 그 속에는 스치기만 해도 전 생애가 흔들리는 간절한 기도가 들어 있다
귓가를 스치던 것들의 소리와 멀리 혹은 가까이 바라봤던 것들을 제 몸속에 넣어두고 민흘림기둥이 있던 주춧돌 아래 옛 길을 숨겨놓았다
홀로 서서 느티나무와 거리 재기하며 그림자로 말을 주고받는 삼층석탑 풍탁 소리 번지는 자리마다 지나간 시간을 다 들어 올릴 듯 꽃다지 냉이꽃 피었다 잠들어 있는 것들도 뒤척이며 조금씩 길을 풀어 놓는다
불길이 지나갈 때 하늘 모퉁이에서 몇 번이나 적란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가 아직도 숨 닫지 않은 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천 년 전의 기억들은 모두 명주실 같은 실핏줄이 되어서 회랑을 돌아다닌다
거돈사지 느티나무, 봄이면 가지 끝에 내다 거는 룽다를 헤아리는 데 천 년이 걸렸다 수억 만 장의 이파리룽다에 그물 무늬로 새겨놓은 옴마니반메홈 폐사지의 주불전이다
김경성 시인 / 절집과 새집 사이
송진내 나는 적송을 들어 올려서 새 집을 짓고 있다 부챗살 모양의 붉은 뼈대가 드러난 절집에서는 목탁소리가 새벽달을 불러서 숲을 깨우기도 한다
사다리차가 끌어올리는 나무로 지붕을 이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비늘 켜켜이 일으켜 세운 나무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학처럼 날개를 편 처마 끝에서 나무의 날개를 본다
집 뒤쪽에서는 새들이 벚나무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어스름해질 때까지 삭정이를 물어다가 바람구멍을 채워 넣고 있다 벚나무에서 벚꽃이 피어나는 날 하늘 쪽으로 창문을 낸 둥근 집에서도 새소리가 피었다
절집에서는 곱게 들인 단청 빛의 지지 않는 꽃들이 피어나고 까치집에서는 벚꽃이 피어서 구름처럼 뭉클거리고
나무가 새가 되어 날개를 편 절집과 새들이 나무가 되어 벚나무에 지은 집 사이에 세 들어 사는 그 사람은
바오밥 나무를 몸속에 넣어두고 닿으면 금세 스며들고 싶은 젖은 말들의 씨앗으로 집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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