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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46) 치과의사 강대건 라우렌시오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9.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46) 치과의사 강대건 라우렌시오(상)

한센인 1만 5000여 명 치과 치료해준 ‘슈바이처’

가톨릭평화신문 2022.12.04 발행 [1689호]

 

 

 

▲ 강대건 원장은 평생 봉사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는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고 진료 봉사의 삶을 이어갔다. 강 원장이 자신의 진료 기록부를 들고 미소 짓고 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여한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

 

 

“명의(名醫)는 사람의 병을 치유하지만 신의(神醫)는 인간의 마음, 영혼까지도 치유하는 의사입니다. 치과의사 강대건 라우렌시오 원장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을 위한 무료 진료와 치료도 하셨고 한센인 환자를 오랫동안 돌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셨습니다. 원장님은 평생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광스럽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이 훈장을 원장님에게 수여해주셨습니다. 원장님을 따르는 많은 봉사자, 특히 많이 젊은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좋은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2013년 9월 11일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여하는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을 강대건 원장에게 대신 수여하면서 한 인사말이다. 이 훈장은 1888년 레오 3세 교황이 제정했다. 두드러진 공로를 세우거나 교회를 위해 헌신한 평신도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훈장이다. 강 원장은 그해 12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치과의사가 교황과 한국 정부의 훈장을 연거푸 받은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몹시 궁금해했다. 국내외 언론을 통해서 강 원장의 활동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칭송했다.

 

나도 강대건 원장님에게 대신학교 1학년 때 어금니 보철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이후 언젠가 그 어금니에 문제가 생겨 새로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를 하던 의사선생님이 빼놓은 보철을 보면서 이렇게 강한 보철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 보철을 30년 넘게 사용했다고 하니 의사선생님은 한 번 더 놀랐다. 강 원장님이 일정을 끝내고 밤에 보철을 직접 제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사제, 수도자, 신학생들의 틀니와 보철을 모두 그렇게 만드신 것이었다.

 

Q. 안녕하세요. 근황은 어떠세요

 

A. 허 신부님, 오랜만에 전화 주셔서 반가워요. 오래전에 영천시장 병원은 문을 닫았어요. 이제는 거동도 불편하고 종일 기도하면서 지내요. 그래도 마음은 아주 편해요. 평생 봉사한다고 가족에게 늘 미안하고 죄송하죠. 그래도 자녀들이 잘 커 주어서 주님께 감사드려요.

 

Q. 평생 봉사하시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어요

 

A. 가족이 내게 무척 섭섭해 하는 것이 당연하죠. 제대로 먹이기를 했나 좋은 옷 하나를 사줬나, 당연히 이해해요. 집안의 가장이나 아빠로서도 0점이죠.(웃음)

 

Q. 그래도 따님이 “아버지가 하신 평생의 봉사가 교회와 사회의 인정을 받아 자랑스럽다”라고 하셨지요. 따님이 영천시장의 치과를 지날 때는 친구들이 거지 치과라고 놀려서 속이 많이 상했었다고 하던데요

 

A.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당시에 아버지가 의사면 부잣집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치과를 시작한 이후 인테리어도 잘 안 하고 40년 그대로 사용했으니 나중엔 고물상 같았을 거예요. 응접실 소파와 책장은 40년은 사용했을 것 같아요. 벽면 시계도 30년 되었을 정도니까요.

 

Q. 어떻게 치과의사가 되셨나요

 

A. 제가 대구에 살았는데 6·25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어요. 이모부가 운영하는 치과에서 어깨너머로 틀니 만드는 기공 일을 배웠어요. 그것이 치과의사가 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1957년 서울대 치대를 나와 군의관 생활 후 1963년 치과를 개원했지요.

 

Q. 저도 대신학교 1학년 때 선생님에게 보철치료를 받았어요. 여름방학 때 치료받으러 치과에 갈 때마다 치료받는 손님은 모두 다 수녀님 신부님 신학생들이었는데, 다 무료로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때 한 동료에게 “선생님은 돈은 어떻게 벌지?”라고 이야기했던 생각이 나네요.

 

A. 제가 돈을 먼저 생각했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예요. 개원할 당시는 건강보험이 없어 진료비가 무척 비쌌어요. 보통 가정에서도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가지 않고 진통제로 고통을 참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1970년대 중반 수녀원에 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만난 한 20대 젊은 수녀님이 어금니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당연히 건강이 안 좋아 보였죠. 제게는 충격이었어요. 그때부터 서울 시내 모든 수녀원을 다니며 진료하기 시작했고 대신학교도 방문했던 거지요.

 

Q. 한센인을 오랫동안 돌보신 것은 사실 잘 몰랐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A. 1970년대 후반에 가톨릭 치과의사회에서 나환자촌으로 무료 진료를 나가기 시작했을 거예요. 어느 날 한 치과에서 나환자들이 매를 맞으며 쫓겨나는 것을 목격했어요. 당시 한센인들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삶이 팍팍했고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아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했어요. 저는 ‘치과의사가 뭐 하는 사람인가. 이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치아를 찾아주어 밥을 먹게 하는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치과 일을 하고, 일요일에는 나환자촌을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센인들을 거의 격리 차원에서 100여 개의 정착촌에 모여 살도록 했지요. 정착촌은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깊은 곳에 퍼져 있었어요. 주일 새벽부터 일어나 기차와 버스, 택시를 갈아타도 점심 무렵에 겨우 도착하는 오지가 많았어요.

 

Q .한센인들에게는 어떤 치료를 해주셨나요

 

A. 썩은 이는 무료로 뽑아주고 이가 없으면 틀니를 만들어줬어요. 어느 분이 무료 봉사는 오래 못한다는 충고에 재료비만 받았어요. 당시 틀니 한 개를 기공사에게 제작 의뢰하면 보통 30만 원이 필요한데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제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병원 일이 끝나고 틈틈이 틀니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1개당 10만 원이면 가능했거든요.(웃음) 제 병원 한쪽에서 틀니를 직접 만들기 위해 기공사 자격도 취득하고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었어요.

 

Q.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철인(鐵人)처럼 일하신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A. 그런 셈이죠.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건강을 허락하셨나 봐요. 일요일 새벽에는 피곤하기도 하고 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았지요. 간신히 유혹을 떨치고 몇 시간을 먼지 풀풀 나는 버스 타고 오지에 도착하면 새벽부터 나와 온종일 동네 어귀에 앉아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는 어린이들, 어르신들의 눈을 보면 다시 번쩍 정신이 들었어요.

 

Q. 얼마나 많은 한센인들을 돌보셨나요

 

A. (잠시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말씀하셨다) 많지 않아요. 전국을 돌며 진료한 환자는 약 1만 5000명 정도 되고, 직접 만들어준 틀니를 해 준 분들은 5000여 명이 넘을 거예요. 남은 진료기록부만 10권이 넘는데 환자 이름과 치아 상태, 진료 과정이 꼼꼼히 수기로 기록돼 있지요. 한센인은 일반인보다 장수한다는 내용 등과 같이 후배 의사들이 참고할 만한 자료라고 생각해서 잘 사용되었으면 좋겠어요.

 

Q. 그런데 궁금한데 한센인들을 처음 치료할 때 어떠셨어요

 

A. 사실 저는 젊은 혈기로 의기양양하고 괜찮을 줄 알았어요. 실제 현실에서 처음 한센인의 입을 들여다보며 치료하는 것은 무척 무서웠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장갑을 두 개씩이나 끼고 진료했지요.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 제가 전염되는 것은 괜찮은데 가족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요. 그때도 가족에게는 한센인 치료한다는 말은 비밀로 했거든요.   <계속>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47) 치과의사 강대건 라우렌시오(하)

천대받는 한센인들이 제게는 예수님이고 성모님이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12.11 발행 [1690호]

 

 

 

▲ 강대건 원장은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린다. 그는 평생 한센인들 1만 5000여 명을 치료해줬고, 밤에는 치과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직접 보철을 제작했다.

 

 

2013년 5월 첫 주 화창한 봄날 주일 아침에 김득권 신부님께서 전화하셨다.

 

“허 신부, 내일 한센인들을 위해 33년 동안 쉬지 않고 치과 봉사를 한 강대건 원장님이 감사패를 받게 되었어. 이제 마지막이니 교회 언론이 와서 취재했으면 해서.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잖아.”

 

“예전에 저희 신학생들 치과 치료해주시던 강대건 원장님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래, 맞아, 그 강대건 라우렌시오 원장님.”

 

“언제부터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셨어요?”

 

“벌써 33년이 지났어….”

 

김 신부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나니 이것은 교회뿐 아니라 일반 언론과 외국 언론에 알려야 하는 굿뉴스임을 직감했다. 실제로 다음날부터 일반 언론의 기자들도 강 원장님의 봉사 활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취재하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이탈리아나 프랑스, 미국의 신문들도 큰 관심을 보였고 나는 대략 다섯 군데 외국 언론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그만큼 세계 교회 내에서도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얼마 후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께서 당시 교구장 수석비서였던 내게 강 원장님에 대한 교황님의 훈장추서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부터 자료를 준비해 주한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훈장추서 요청서류를 보냈는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구장님께 예외적으로 3개월 만에 아주 빠른 허락 서신의 답신을 보내주셨다.

 

Q. 지금도 교황님 훈장을 받으셨을 때가 기억나실 텐데 감회는 어떠세요

 

A. 솔직히 저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저는 언론에 알려지고 교회가 특별히 추천해주셔서 큰 상을 받게 된 거죠. 내가 도울 사람이 그때 많았을 뿐이고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없어요.

 

Q. 너무 겸손한 생각이세요. 2012년에 한센인들 봉사를 그만두신 것은 선생님의 건강 때문이셨나요

 

A. 당시에 제가 팔순이 넘어 물론 기력도 많이 떨어졌겠죠. 제가 초창기 진료 때는 40여만 명이던 한센인 수가 1만 명 남짓으로 줄어들면서 진료할 대상도 많이 줄었어요. 그리고 한센인에 대한 인식도 많이 좋아졌고요. 2012년 전북 고창에서 마지막 진료를 마치게 된 것도 그 지역 한센인 환자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에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그러면서 마지막 진료 일기를 꺼내 보여주셨다. 대학노트에 원장님이 직접 손으로 꾹꾹 눌러 쓰신 글이 눈에 들어온다.)

 

“제가 진료를 맡은 전라북도 호암마을 정착촌은 전북 제일 서쪽에 위치한 외지로 40호 정도입니다. 요즘은 한센 환자 등급이 있어 연금이 매달 25만 원에서 40만 원 정도 지급됩니다. 칠십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옛날 지원을 못 받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부자가 됐다며 이젠 혼자 사는 데 괜찮다며 웃으십니다. 동네 한 부부는 농사지으며 못사는 아들에게 도움까지 주고 산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이제 환자가 없어서 진료소 문을 닫습니다. 초기엔 한센환자들이 몰려와 줄까지 길게 선 상황이라 점심도 거르면서 진료했던 때가 많았습니다. 30여 년 동안 국가 경제가 많이 발전하고 사회보장제도 또한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주님! 한센환자 수도 자연 감소로 수가 급격히 줄어 오늘 주일 치과 진료소를 정착촌에서 철수합니다. 이날을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합니다.”

 

Q. 교회 홍보를 오래 맡고 있었던 저도 최근에 강 원장님이 한센인들을 오랫동안 치료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활동을 외부에 알리지 않은 이유가 있었나요

 

A. 제 성격도 소극적이고 한센인 봉사는 첫 번부터 주변에 일절 알리지 않았어요. 가족에게도 비밀로 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썼어요. 그 긴 세월을 김득권 신부님은 저의 봉사활동을 자문해주시고 진료 봉사 재정보고서 감사도 해주셨어요. 사실 김 신부님이 몇 번 신문 인터뷰를 권하기도 하셨어요. 다른 건 다 신부님 말씀을 따랐는데 ‘선행은 인간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고, 제가 하는 일이 알려지는 것을 무척 꺼려서 인터뷰는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도 들어요. 조금 제가 완벽주의라 자신을 채찍질했던 것 같기도 했고요. 공동체에서 주는 감사패나 외부의 큰 상들도 항상 거절했어요. 아무래도 알려지면 제가 하는 일에 지장을 줄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사실 주일 진료를 하다 보면 시간에 쫓겨 점심을 거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인터뷰할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환자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웃음)

 

Q. 주변 분들은 선생님이 조금만 짬이 나도 눈을 감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는데 무슨 기도를 하셨나요

 

A. 지금처럼 빠른 KTX가 없던 때라 새마을호 기차로 당일 왕복 거리치곤 서울과 대구는 짧은 거리는 아니었죠. 진료 외에 남은 시간엔 늘 기도했던 것 같아요. 가장 많이 한 기도는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였어요. 연옥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기도가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겠죠.

 

Q. 강 원장님이 늘 상이나 기념패를 거절했는데 2013년에는 전국 가톨릭 한센인들의 모임에서 주는 감사패는 받으시겠다고 하셨어요. 한센인들은 꼭 원장님에게 무엇이라도 하고 싶으셨을 거예요

 

A. 저는 사실 봉사를 다 마치고 한국가톨릭자조회의 2013년 3월 연례 총회 자리에 참석하고 감사패를 받으려고 했는데, 마침 병이 들어 참석을 못 했지요. 그 이후 감사의 뜻을 직접 전하기 위해 논산, 대구 등지에서 서울 제 병원으로 찾아오신다고 해서 감사패는 받게 되었어요. 지도신부이신 김득권 신부님도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저를 설득하셨죠. 전국의 한센인들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감사패 전달식에는 가톨릭자조회 회장 및 대표자들과 엠마 프라이징거(Emma Freisinger) 여사와 김 신부님이 참석하셨죠.

 

Q. 그 감사패 전달식이 강 원장님이 하셨던 봉사의 삶을 비로소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었죠. 그런데 원장님은 늘 가족에게, 특히 아내분에게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셨어요. 그런데 만약 혹시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봉사하시겠어요

 

A. 봉사는 제게 기쁨을 주지만 그만큼의 인내도 필요한 것 같아요. 노고의 땀과 수고와 고민이 늘 교차하죠. 그래도 자기와의 투쟁 속에서 봉사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 아름다움이 되는 것 같아요. 봉사의 기쁨을 맛보면 남한테 안 주고 싶어요.(웃음)

 

강 원장님과 나눈 대화 중에서 잊히지 않는 대목이 있다. 어느 날 원장님이 한 병원에 갔는데, 그 병원에 찾아온 나환자를 보고 병원은 돈을 집어 던지고 발로 차면서 내쫓았다고 한다. “문둥이 자식, 어디 병원 망하게 할 일 있어?”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그때 땅에 쓰러져 주눅이 든 환자의 눈빛을 원장님은 보았다고 한다. “아마 저는 죽을 때까지 또렷하게 기억할 거예요. 저는 그 환자의 눈빛이 성모님과 예수님이라 믿었어요. 당신의 눈빛을 저에게 보여주시고 주님의 봉사자로 부르셨다고 믿어요.”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