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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휘민 시인 / 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14.

휘민 시인 / 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

 

 

까만 밤이라 쓰고 환한 어둠이라 읽는다

초침 소리가 커질수록 동공 속에 차오르는 만월

수직의 세계에 서 있는 나는

수평의 세계로 떨어지는 당신에게 갈 수 없다

 

시간의 꼬리를 붙잡으려

분침과 초침을 겹쳐 보지만

당신은 내 손을 뿌리치고 더 멀리 달아난다

 

눈을 감으면 천길 낭떠러지 눈을 뜨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환한 어둠

긁어도 긁어도 스크래치만 남을 뿐 당신의 하늘은 더 밝아지지 않는다

 

죽음이 점점 당신의 숨통을 조여오던 그 시간

나는 왜 이제는 잊힌 제2외국어를 떠올렸을까

 

마마마마

엄마는 1성 삼베는 2성 말은 3성 욕하다는 4성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 만에 불현듯

떠올라 어깨 위로 미끄러지는 성조들

그사이 당신의 숨은 모스부호처럼 흐르다 바닥으로 내리꽂힌다

 

끝내 번역하지 못한 당신의 유언

 

바닥까지 내려가는 슬픔은 절벽의 깊이가 아니라

그 끝을 딛고 버티는 발등의 두께로 기억될 것이다

 

마마 마마

까만 밤 수직의 세계 속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허리가 긴 슬픔

숨이 빠져나간 자리가 오래도록 환하던

 

마 마 마 마

우리는 더운 숨을 식혀가며 탁성으로 울었다

달빛이 어룽거리는 창으로 슬픔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월호 발표

 

 


 

휘민 시인

1974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 본명 박옥순. 청주과학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 시집으로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가 있고,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선수』와 그림책 『빨간 모자의 숲』을 펴냄.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