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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종현 시인 / 바람이 분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4.

서종현 시인 / 바람이 분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혼자 내린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 네가 떠나간 거라고 말하며 들을 수 없는 영역에서부터 점점 선명해지는 소음의 열차는, 간다 소음보다 먼저 간 열차의 뒷모습이 멀리 소실점 속으로 사라지고 뒤늦게, 소음도 기차를 따라 다시 들을 수 없는 영역으로 돌아간다 귀 없는 곳에서 태어나 사람에게까지 불어온 소음 바람은 가만히 서 있다 멈춰선 바람 너머로 역의 풍경이 불어 간다 한 번은 거쳐 간 사람들의 얼굴까지 실어 오며, 역은 바람을 스쳐 간다

 

 이번에 들어올 열차는

 

 나와 무관한 소음 누군가 내리더라도 그저 혼자 불어갈 사람 바람은 스스로에 대한 오해를 말한다 부는 건 자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자신의 곁으로 사람이 별의 바깥까지 불어가는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흔들리는 내가 흔들리는 건 사람이 내게로 불어오기 때문 눕는 내가 눕는 건 사람이 나를 자꾸만, 밀어내기 때문 과장된 몸짓으로 별의 이름을 별까지 불어 보내는 건 아마, 사람 사람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나 역시 바람의 이름을 빌려 여기까지 불어온 것 홀로 왔음이 누군가를 탓하고 그 누군가의 정체를 가리는 것

 

 나는 내게서 불어나오는 소음을 듣는다 내가 도착하고 또 떠나갈 때 언제나 먼저인 소음 들을 수 없는 영역에서 태어난, 나는 흔들림을 탓하지 않는다 사람의 가운데에 서서 사람이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 불지 않는 바람에 거짓을 전하고 바람을 빌려 저 멀리 별의 바깥에 무관한 이름을 전하는 나는,

 

 지금 들어오는 열차는 타지 않는다 아무도 불어나오지 않는 열차 소음을 남겨둔 채 나는 열차보다 먼저 간다 나의 뒷모습이 소실점보다 먼저 사라지게 하기 위해 바람이 불 수 있게 하는 것 나는 멈춰서 흔들리지 않고, 부는 사람이 별에게서 별의 이름을 흔들어 떨어지게 하는 것

 

 그때 나는 열차를 타고

 

 


 

 

서종현 시인 / 우물 속에 살다

 

 

높은 우물 속에 살다 자신의 척추에 기대 졸고 있는 남자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다 발소리 같은 쥐가 지나가고

눅눅한 벽이 체온을 건드리다 명암이 없는 꿈에서 새어나오는

잠꼬대 억눌린 혀끝이 미열의 속내를 가늠하며 신음하는

이명 귓바퀴를 타고 돌며 홀로 수신하는 모국어가 낯설다

낯선 꿈이다 부드러운 악몽조차 따가운 망각 이빨을 맞부딪다

소문처럼 울리는 소리가 우물의 높은 구멍까지 재빨리 올라가다

사라지다 오직 소리만 빠져나가는 거리

짧은 진동에서 자라나는 이끼처럼 매달려 남자는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다

고통에도 지문이 있어 수천 년의 빗물이 따라 흐르는

단 하나의 얕은 골 고이지 않는 빗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

남자의 주름이 깊어지다 온몸을 동여매는 빗물의 사슬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다

더이상 검은 빗물에 물들지 않는 남자의 머리칼이 오래 자라다

홀로 환하다 눈동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우물 밖의 색

짧은 지름의 구멍이 높아지다 남자의 꿈이 낮아지다

자개 같은 바퀴벌레가 가장 우월한 종족의 문신처럼

남자의 손등에 머무르다 남자는,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다

딱딱한 길몽조차 따가운 기억

남자는 기억 속에서 망각을 길어 올리고

망각 속에서 기억을 길어 올리다

자신의 척추에 기대 깨어나지 않는

높은 우물 속의 남자

 

 


 

서종현 시인

2004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5년 중앙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202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현재 현대시학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