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률 시인 / 오후의 잠
오후에는 잤다. 법이고 규칙이고 생활이고 아이 마누라 밥통 시달림 죽은 꽃 나발이고 잊고 잤따. 지하실과 시멘트와 벽과 피뢰침이 꽂힌 옥상을 옥상에서 쏟아지던 햇볕을 잊기 위해 흐린 기억을 끼고 잤다. 이제 희망 따위는 없다. 기다림과 외로움과 슬픔 따위도 없다. 문학도 없고 시간도 없고 술에 취한 정신병자도 없다. 파계와 구원과 지옥 천당도 없고 열반도 없다. 집과 네모난 방과 벽에 박힌 못과 바퀴벌레와 흔들리는 옷걸이를 잊고 백치같은 해는 종일을 타는데 더 이상 시들지 않기 위해 오후에는 잤다.
주병률 시인 / 병어
아직도 어린 딸인데 늦은 밤 편의점에서 시급으로 받은 돈으로 아빠가 먹을 거라고 병어회 한 접시를 사 왔다. 병어는 봄, 연안을 방금 헤엄쳐 온 듯이 은박지처럼 반짝거리고 나는 납작하니 낡은 식탁에 진 흙처럼 앉아서 마른 손가락으로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써 본다. 밤은 깊어 가는데 식 탁 위에는 온통 봄 연안을 건너온 병어의 가시뿐이다. 경칩이 지나고 오늘은 늦도록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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