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겸 시인 / 속초, 새벽 두시에서 아침까지
수학교사 딸의 휴가 일정이 간신히 잡은 속초시 영랑해안5길 37-영랑하우스팬션 401호의 새벽 2시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화진포 송림해변길을 걸은 늙은 여행자가 피로에 쓰러졌다가 어김없이 눈뜬 새벽 2시 해변의 포차 옆에서 아이들 폭죽놀이처럼 시끄러웠던 파도 소리가 멎은 새벽 2시 팬션 간판의 네온 불빛이 달빛을 대신해서 스며들고 있는 새벽 2시 바다의 어둠이 동해를 시간의 그물에 묶어 대항해 시대의 마젤란처럼 스페이스의 은하별까지 항해하고 있는 새벽 2시
속초에서 고성을 지나 휴전선을 건너가면 금강산 해변인데 남한 여자 관광객이 북한 여군의 사격으로 죽은 사건을 상상하는 새벽 3시 남한 여자 관광객은 동해 일출을 보기 위해 관광제한구역 바리케이트를 넘어갔으나 그날에 운명의 검은 태양이 부상했다고 상상하는 새벽 3시 북한 여군과 남한 관광객이 그 자리에서 조우한 복잡계의 사건들-전생의 전생의 인연들이 바벨탑처럼 올라갔다가 총성 두발에 무너지는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를 상상하는 새벽 3시 남한과 북한의 역사가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스토리가 비극인지 희극인지 바다 의 신-포세이돈의 삼지창만이 알고 있다고 상상하는 새벽 3시
늙은 여행자가 시간의 밀물과 썰물이 4계절 해변을 연출하는-해와 달의 중력게임들이 펼치는 에너지장을 지금까지 걸어왔다고 몽상하는 새벽 4시 늙은 여행자의 피와 체액은 지하수와 강물로 스며들어 바다로 돌아가니 목숨이 고향을 찾아온 셈이라고 몽상하는 새벽 4시 몸의 피가 바다의 염분 농도를 기억하고 있으니 생명의 역사가 유전자의 정보 속에 파도처럼 스며 있다고 몽상하는 새벽 4시 time의 어원은 tide이니 늙은 여행자가 바다의 파고와 파저로 인생의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저울질하는 새벽 4시
늙은 여행자가 화장실에서 눈썹의 피곤함을 세수하고 거실에서 물끄러미 현재를 바라보고 있는 새벽 5시 파도소리가 높아졌으니 다시 바람이 부나보다 생각하는 새벽 5시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는 발레리의 시는 칠십에 이른 여행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생각하는 새벽 5시 해변의 가로등 불빚이 ‘차단한 불빛이 비인 하늘에 홀로 서있다’는 김광균의 와사등처럼 아직 꺼지지 않은 새벽 5시 잠이 부족한 늙은 여행자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커피를 사러 편의점을 찾아야 하나 참아야 하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새벽 5시
속초시 영랑해안길에는 바다의 파도소리에 무너지고 있는 낡은 슬라브 건물들의 열병식이 있다 갈매기들의 날개가 어지럽고 어선들의 스크류 뱃길이 크레타의 미궁처럼 파도치는 어둠 속으로 흘러간 해변 풍경 상호는 해녀전복뚝배기 이지만 양식이 분명한 내장 전복죽을 아침으로 먹고 나온 속초 해변에는 불가사리 같은 테트라 구조물이 늘어선 방파제가 있다. 늙은 여행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해변의 벤치에서 수학을 공부하는 딸과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이야기하다가 수학이 자연의 진리를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견해에 일치를 본 순간까지 살아왔구나
반년간 『세종시마루』 2022년 하반기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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