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 / 노을 아래서
첫 비행에 나서는 앨버트로스는 날개를 위해 속을 비우는데 호주머니 뒤집어 먼지를 털 듯 청어의 잔뼈를 뱉고 바람을 채우는데 그날 온종일 게워낸 것은 묽은 죽처럼 풀어진 노을이다
가볍고 투명하고 반짝거려서 칼날을 숨긴 푸른 꽃을 삼킨 것이다 마침내 하늘을 놓치고 말았음을 바다 끝에서 노을이 올라올 때야 알았다
노을은 어린 고래 한 마리를 실어 왔다 모래 위에 얹힌 고래는 접시에 담긴 초록 젤리 같다 옆구리에 번진 멍이 모랫바닥으로 스며든다
가장 큰 지느러미와 가장 큰 날개가 영문도 모르고 해후하는 저녁 병뚜껑과 폐타이어 조각과 찢어진 어망이 밥통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저녁 노을은 협죽도 빛깔로 타오르다 조용히 얼굴을 가리며 물러난다
송은숙 시인 / 죽은 새를
죽은 새를 가방에 넣고 다닌 적이 있지 죽은 제비를, 미끈한 검은 날개와 고요히 감긴 눈꺼풀을 궁륭 같은 늑골을 왜 그랬는지 몰라 버려두기엔 너무 작고 가벼웠을까 애처로운 울음을 환청처럼 듣고 햇살 잘 드는 한 뼘 땅을 찾으려 했을 거야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던져버렸지 해를 향해 날아가던 새는 한 줌 재가 되어 부서졌네
매일매일 만나는 수많은, 수많은 날개 찢긴 잠자리 다리가 모두 꺾인 풍뎅이 반쯤 파 먹힌 곤줄박이 개구리와 쥐와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꼬리를 잃어버린 얼룩고양이와 꽃잎처럼 스스로를 장사지내지 못하는 것들 도르르 제 몸을 말지 못하는 것들엔 개미와 구더기가 들끓지 부지런히 자르고 저미는 동안 움찔움찔,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 바람까지 싹싹 혀를 핥는 만족한 식사가 끝나면 진초록 갑옷의 날개 한 장 남았네 나는 그걸 갖고 싶었어 이빨을 박을 수 없는 강철로 된 무지개*를
* 이육사 「절정」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인한 시인 / 빈 손의 기억 외 4편 (0) | 2023.03.27 |
---|---|
박진형 시인 / 희망 사육 외 1편 (0) | 2023.03.27 |
신용목 시인 / 긴긴 밤 (0) | 2023.03.27 |
한정원 시인 / 마음에 빗장을 걸다 외 2편 (0) | 2023.03.27 |
김혜순 시인 / 핏덩어리 시계 외 1편 (0) | 2023.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