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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용목 시인 / 긴긴 밤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7.

신용목 시인 / 긴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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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 지낸 삼년을 다 살고

깨어나면 또 죽고

열아홉 살이었을까요, 다락방에서 고장 난 시곗바늘을 빙빙 돌리다 바라보면

창밖은 시계에서 빠져버린 바늘처럼 툭 떨어진 어둠

그러니까

열아홉을 떠올리는 일은 열아홉이 되는 일이 아니라 열아홉까지의 시간을 다

살게 하는데,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시곗바늘처럼

창밖에는

숲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었을 뿐, 생각은 해마다 달력을 찢기 위해 먼 나무를 쓰러뜨리는 푸른 벌목장입니다

숲이 사라지면 초원이

초원이 사라지면

사막이

죽은 짐승의 뼈를 하얀 가루로 날릴 때, 모래에 비스듬히 꽂힌 뿔이 가리키는 침묵처럼

세벽 세시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야기

눈을 감으세요,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이미 죽어서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긴긴 밤이라면

귀를 막으세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죽어서 이 이야기를 영영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긴긴 밤이라면

당신은 어디 있나요, 두리번거리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찾습니다 긴긴 밤이라면

그건

우리 다 아는 이야기,

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사라짐을 위하여 나는 새벽 세시에 깨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지나가는 것처럼

창밖에는 바람이 분다고 들었습니다

저녁에 헤어지고

다음날 만났을 때, 네게 십 년이 지나갔구나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아놓아서

밤은 캄캄합니까 열아홉 살 다락방, 시계 속 단단하게 감겨 있던 검은 태엽처럼

열아홉은 꽁꽁 묶인 채 사라졌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묶어놓아서 밤은

날마다 굴러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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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청색종이』 2022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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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愼鏞穆) 시인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2000년 《작가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 시작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등 수상. 2017. 제18회 현대시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