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용 시인 / 고해성사 하늘이 날개 키우듯 당신은 늘 새털구름과 함께 날고 있었으나 나는 겨운 당신의 날갯짓을 응원하지 못했습니다 땅이 나뭇가지 키우듯 당신은 늘 땅강아지와 함께 걷고 있었으나 나는 파인 당신의 발자국을 다독이지 못했습니다 구름의 감정이 눈물처럼 새어 나오거나 두더지의 문장이 가슴을 후벼팔 때도 무릎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줄 알았고 복숭아뼈는 늘 붉을 줄만 알았습니다 벌 나비 들여 열매 키워가는 저 꽃들 보면서도 비바람 맞으며 대공 키워가는 저 풀들 보면서도 그렇게들 살아가는 줄 알았고 그렇게들 살아내는 줄 알았습니다 삼백예순날 가문비나무에 기대어 쓰레름- 쓰레름- 매미처럼 시한부 삶을 하소연해도 내 선글라스는 언제나 모르쇠로 일관했고 내 망원경은 멀어지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습니다 실하던 당신의 축대는 시나브로 무너져내렸고 서까래도 골다공증으로 허하게 주저앉아 버려심 폐소생술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바다가 지느러미 키우듯 당신은 늘 혹등고래와 함께 남북극을 오갔으나 나는 가뿐 당신의 숨소리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뭉개지고 심장이 멎은 후에야 당신이 나였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세종문학』 2022 제28호 초대시 중에서
박주용 시인 / 보내기 번트
야구방망이 대신 꽃 한 송이 들고 들어선 빈소 촛불이 툭툭 허리 굽히며 모션 취하는 순간 코끝 찡하게 어루만지며 보내오는 감독의 사인 타석에 들어서 있는 슬픔의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문상 끝낸 사람들은 저희끼리 모여 베이스에 진루해 있는 주자의 트레이드 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삼루쯤에서 홈으로 내달릴 준비하는 영정 속 사내 주위로 국화꽃 하얗게 피어나고 있는 찰나 지상의 마지막 호흡을 모아 번트를 댄다
사람 보내는 일,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시집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에서
박주용 시인 / 묵묘
알몸은 봉긋했던 봉분에 밋밋한 평지 하나 얹기까지 수억의 구름 삼켰을 터, 절정의 끝자락에 잠자리 한 마리 평온하게 올리기까지 수만의 소지 올렸을 터
자작나무 등걸도 스스로의 생각 주저앉히고 흘러내려 시나브로 이승 지고 있다
주저앉은 것들, 시간에 깎이고 다듬어져 모난 것이 없다 흘러내린 것들, 열두 구비의 생각도 모자라 웅덩이 파놓고 동안거 들고 있다
얼마나 둥근 묵언 수행이기에 가시나무도 저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쉿, 우주의 꽃봉오리 열반 중이다.
-시집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에서
박주용 시인 / 내 삶에 무꽃이 피었다 하여 텃밭에 나가보니
시퍼렇게 멍들어도 어쩔 거여 허옇게 살아야지
장다리꽃, 시리다.
-시집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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