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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삼환 시인 / 낡은 벽시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0.

김삼환 시인 / 낡은 벽시계

 

 

오래된 빈 집

안방 벽에

낡은 벽시계 하나 걸려 있다

누렇게 색이 바랜 부부 사진 옆에

학사모를 쓰고 있는 아들 사진 아래

지친 팔다리 서로 포갠 듯

시침 분침이 엇갈려 멎어 있다

시간의 올이 풀리다 멈춘 시간부터 지금까지

아침 햇살이 찢어진 창호지를 통과하여

거미가 엮어놓은 시간그물을 뚫고

마당가 사금파리 위에 쏟아놓은

눈부신 헌사

누군가 밑줄 그어놓은

마지막 단락에 보내는

말 없는 경외

눈 뜨고 자고 있는

벽시계의

이 무극!

 

 


 

 

김삼환 시인 / 장작을 패면서

 

 

녹슨 도끼로 장작을 팬다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내리치면

시원스럽게 두 쪽으로 쫘악 갈라지는 나무

그 동안 얼마나 굴곡 없이 곧게 자라왔는지

적당한 양의 햇빛과 바람과 이슬이 함께하여

섬세한 손길로 잘 다듬어진

마음속의 결이 명쾌하다

곁눈질하지 않고 쭉 쭉 뻗어올라가면서

결대로만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쪼개지는 장작

잘 쪼개지지 않는 장작과 대화하기란 늘 힘에 겹다

짧은 여름 긴 겨울 속에서

볕을 향한 연모도 아주 잠시

걷고 있는 길이 구불구불 얽히고설켜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은 복잡한 여정의 기록

마음을 닫아 켜켜이 쌓이는 암덩어리처럼

군데군데 박힌 단단한 옹이

아무리 날선 도끼로 내리쳐도

정수리를 쪼개지 못하고

왼쪽이나 오른쪽 변죽만 건드리고 만다

끝내 단면도를 보여주지 않고

마음의 실체를 숨긴 채

잘려나간 팔다리

생각이 복잡하여

내리지 못한

결론

 

 


 

김삼환(金三煥) 시인

1958년 강진에서 출생. 1992년 《한국시조》 신인상 수상 및 1994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제15회 한국시조작품상 및 제3회 바움문학상 수상. 시집 『적막을 줍는 새』 『풍경인의 무늬여행』 『비등점』 『뿌리는 아직도 흙에 닿지 못하여』 『왜가리 필법』 『묵언의 힘』 『따뜻한 손』 등, 현재 〈역류〉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