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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찬 시인 / 구암리 고인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7.

김기찬 시인 / 구암리 고인돌⁕

 

 

 

죽음이 한데 모여 살고 있다

밤이고 낮이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저 어둡고 습한 돌무덤에는

내 안의 피가

내 아버지의 문드러진 살이

내 할아버지의 삭은 뼈가 기록되어 있다

술 한 잔 따라 올리고 싶은

죽음을 고인 돌

 

 

열한 마리 돌거북 가족들이

천년도 더 넘게

한 발짝도 떼지 않고

먼 길 가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까 거북스럽게,

평생 갈 곳도 없으면서

시간이 지칠 때까지

천 리를 가고 있다

 

 

나는 문득 생각해본다 내가 들어와 갇힌 이곳엔 죽음의 시작에 가닿는 문이 있어서

 

잿빛 상복 입은 구름이 늘어서 곡(哭)을 하고 밤새 비는 雨雨雨 눈물 흘리다 가고 어쩌다 달이 조문객처럼 들렀다 가는 곳

 

아득한 먼 곳으로부터 나이 많은 무덤이 시간의 간이역을 건너오고 건너오고 건너와

 

다음 간이역에 도착할 때까지 바로 앞에서 쿵쿵쿵쿵, 쿵쿵쿵쿵 지나가는 지하철처럼 번쩍번쩍 부싯돌 당기면서

 

 

벙벙히 고인 시간이 있다

 

흘러가지도 못하는 저수지가 하나의 물방울인 것처럼

 

오래된 시간은 깊이를 잴 수 없어 맨 아래에서 시커멓게 늙고

 

지금 시간은 넓이를 잴 수 없어 맨 위에서 퍼렇다

 

수천만 년의 고요를 휘휘 장대로 저어본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시간이 고여 썩어가는

 

여기보다 깊은 바닥은 없으리라

 

⁕전북 부안군 하서면 구암리에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남방식 고인돌군이 있다.

 

 


 

 

김기찬 시인 / 멀리 달을 보는 사람

 

 

 그믐이던 마음이 보름 달빛이나 보자 하여 월명암에 오릅니다 한 발 앞서가던 산새도 숨이 가쁜지 호로록 쪽쪽 호로록 쪽쪽 오체투지로 오르다 쉬고 쉬었다 다시 오릅니다

 

 삶을 견딘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 일과 같겠지요 가슴에 맺힌 혈을 풀고 심신을 안정시키자면 맛이 쓰고 성질이 찬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언젠가 방약합편(方藥合編)이 일러줬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오래도록 탕약을 달이듯 멀리 달을 바라보는 사람은 지금 아픈 사람이거나,유독 상처가 많아 누구를 아프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겠지요

 

 다혈질인 나는 독초로 보자면 마땅히 천남성이거나 각시투구꽃의 눈빛일 텐데요 오늘만은 약으로 쓸 것 같은 달빛에 빨대를 꽂고 호로록 쪽쪽 호로록 쪽쪽 빨고 싶은 밤입니다

 

 첩첩산중 꿈틀거리며 꼬물거리며 배어든 달빛이 성미가 따뜻하고 독성이 없는 사람 품 같아서, 병든 몸뚱이 말갛게 씻어주는 향(香) 같아서 그믐이던 마음이 열나흘 흐벅진 달빛이 되어

 

 


 

 

김기찬 시인 / 찻잔에 매화가 오면

 

 

마음을 다치고 맘조리 하느라

몇 년째 눈 시리게 매화를 들여다보지 못했다

한 사흘만 딱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일어나려 했으나

서너 알의 이빨이 사리처럼 쏟아졌다

그러는 사이 많은 것들이 안팎으로 나를 다녀갔다

뼈아픈 절망이 갔고,

치욕이 왔고,

증오가 갔고,

다시 악에 받친 분노가 치밀어 왔고,

손가락이 길어질 대로 길어진 세상은 나를 죽일 놈으로 내몰았으므로

해변에 밀려온 통나무처럼 마르거나 젖은 채로 한 시절을 견뎌야 했다

한번 상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란

한 주먹의 모래알을 씹기보다 한 말의 소금물을 마시기보다 어려웠으므로

여러 해가 지나갔고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의 말도 아프게 잊혀졌다

내 안의 침묵에 또 하나의 침묵을 더하는 동안에도

번쩍하고 등짝에 드릴이 지나갔고 전신에 마비가 찾아왔던가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늙기만을 바랐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 사이를 겉돌 듯 찻잔에 매화가 오면

정말이지, 내 안의 야성의 피가뜨거워져 자주 짐승이 되곤 했다

시시때때로 핏발선 눈을 수평선에 헹구는 동안에도

몇 번의 봄날이 조개껍데기로 해안가를 뒹굴며 지나갔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눈 뜨고 죽어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마음을 고쳐먹던 날들이었다

봄은 피었다 지는 일이 계속되었지만

바다를 건너는 나비처럼 봄날의 깊이를 다 건너기 위해서는

더는 비열해지지 말자고,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나는 나에게 주먹가슴질을 해대며 쌍시옷의 욕을내 뱉어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루머에 멱살 잡혀 정말이지,

아물지 않은 상처에 썰물밀물 철썩거리는 봄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픔이 더 아플 때까지

 

 


 

 

김기찬 시인 / 선퇴(蟬退)

 

 

 누군가 7년 막장의 긴 터널을 뚫고 날아간 흔적, 눈물겹다

 

 아름드리 허공을 기어오르다 미루나무 둥치에 걸어둔 저,텅 빈 울음집

 

 말랑말랑한 속울음이 솟구칠 때마다 차곡차곡 쟁여 넣어 차돌처럼 단단해졌을,

 

 뭉툭한 새끼발가락 같다

 

 울지 않은 생은 없다고 마침내 그가 운다

 띄 엄 띄 엄 반벙어리 첫울음을 울다가 갑자기 온몸에 쥐가 났는지 쥐어짜듯 막 악을 써댄다

 

 누가 이 삼복염천의 한낮에 저리 쇠사슬을 끄는가

 

 아스팔트 길이 패이도록 쇠사슬을 끌며 저 깊디깊은 허공 속울음을 퍼내고 또 퍼내는가

 

 말도 마라, 그 울음소리가 나뭇가지를 잡아 흔들더니, 그 진동이 둥치를 타고 내려가 실뿌리까지 매치더니, 냄비 끓듯 천지사방이 들썩인다

 

 미루나무 열 평의 그늘에다 열 양동이 눈물을 자지러지게 쏟아붓고서야 잠시 멈춘 그 생울음을 나는 모를란다

 

 아무래도 저 질기디질긴 울음 끝은 내 생의 밑바닥에 가닿을 것이다 거기, 내 울음집인 어머니 지금도 거적때기 몸으로 바싹 풍화되어 있을 것이다

 

 


 

 

김기찬 시인 / 미끈도마뱀

 

 

낯선 나와 마주치자 제 꼬리를 스스로

뭉툭,

자르고 달아났다

순간, 동력이 끊긴 꼬리는 놀랍게도

선풍기 날개 돌듯 핑핑핑핑 잘도 돌았다

단박에 모든 걸 잃어버린 막막함 때문이었겠으나

한참을 지난 시간을 되감다 멈춰 섰다

꼬리 어디에 저런 힘이 내장되었던 것일까

몸과 꼬리는 한 몸이었으니

피가 도는 길도 한 길이였을 터

몸통도 꼬리를 잃고 한동안 중심이 흔들렸으리라

 

나도 그랬다,

행복과 슬픔이 한 몸이었던 나의 사랑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의 동력이 끊긴 날

불 나간 빈집 같은 캄캄한 마음 때문이었겠으나

나는 추억의 안팎을 바람개비처럼 돌고 돌아주었다

내가 나를 돌아주었을 때 삶도 사랑도

다 제 살점 떼어내는 아픔이란 걸 알았다

잠시 허기진 마른 입술로

나를 살다 간 맨몸의 그녀는

등짝이 유난히 반짝이던 미끈도마뱀이었다

 

 


 

김기찬 시인

1960년 전북 부안에서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바닷책』 『피조개, 달을 물다』 『채탄부 865-185』 『멀리 달을 보는 사람』이 있음. 석정촛불시문학상, 전북시인상, 한국미래문화상을 수상. 현재 변산 유유마을에서 시창작 지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