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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재종 시인 / 관음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8.

고재종 시인 / 관음사

 

안개가 모공이란 모공에 다 스미어

오리무중이라고나 할까 하는데

안개 그 젖고 젖은 것을 찢고

먼 허공 밖으로 길을 여는

종소리여

그새 나온 새벽달 이고 물을 긷는

공양주 보살이여

공연空然한 마음이여

 

 


 

 

고재종 시인 / 조금은 쓸쓸하고 외로운 노래

 

창문에 배어나는 연노란 치자꽃빛은

배냇저고리 내음이라도 은근히 흘리려나

뜰 가득 가을을 여는 씨르래기는

실을 잣다 시를 쓰다 제풀에 넘쳐난다

구슬 듣듯 쏟아지는 대숲의 떼별과 함께

일렁이는 인연들, 차 한 잔으로 재우는데

뒤란에 뚝뚝 지는 오동잎의 공명이

조금은 쓸쓸하고 외로운 것에 곡조를 단다

 

 


 

 

고재종 시인 / 개기월식

 

이웃들과 아랫마을에 문화예술단 공연 보러 갔다가

공짜 공연 본 죄로 강권하는 만병통치약을 한 박스 이고 왔다

수십만 원 되는 외상값 미처 못 갚아서 독촉장 수없이 받았다

붉은 도장 팡팡 찍은 재산 압류 계고장 계속 받고

오밤중이건 새벽녘이건 협박 전화질 받다가

자식 직장상사까지 알아내 전화질 한 ‘그놈 목소리’ 때문에

자식 앞길 막았다고 순창할매 홀로 제초제를 마셨다

전직 경찰관이라는 그 해결사의 쇠갈고리에 찍힌 삶을

캄캄하게 조문하고 있는 오늘, 개기월식의 지구라니!

 

 


 

 

고재종 시인 / 향기로운 집들이 길 되어 사라지다

 

어느 날 새벽 기침하니 옆 사람이 사라져

그 휑하고 스산한 것이 뒷골 산판 같던 빈자리처럼

자식이 한 다스나 되던 살구나무집은 헐려

살구 더는 매달지 않고 삼인산길 7-3번지로만 남다

마을 집들의 주소가 길 번지로 바뀐 뒤

거북 구龜에 바위 암岩자라서 천수만수 할 거라던

마을 이름 구암리도 이제 불리지 않고

사람들 배앓이며 체증을 용케 잡다가는

거년에 후산 간 송약방집은 노마드펜션으로 바뀌다

흐드러지게 대추가 열려 손 깨나 타는데도

되레 쥔 영감은 한 움큼씩 따서 꼬맹이들에게 나눠주던

대추나무집이 치매요양원을 가자 문짝만 펄럭이고

초여름이면 넝쿨장미의 붉은 함성이 이제 막

가슴은 봉긋봉긋, 코밑은 거뭇거뭇하던 이팔청춘들을

뜨겁게 뒤흔들던 장미울집은

서울 아들 빚에 넘어져 망초만 출무성한 7-5번지가 되다

집이란 집이 죄 삼인산길 7번지로 바뀐 뒤

아래뜸, 위뜸과 고샅의 돌담이 사라지고

모내기 마친 집들이 나앉던 정자 그늘엔 그늘만 쌓일 뿐

상엿집 자리에 성업한 그린장례식장은

돈 벌자 군의원 출마 끝에 세 표차로 떨어지다

참고로 그즈음 마을에서 후산 간 노인이 세 명이어서

죽으려거든 표나 찍고 가지, 했다나 뭐라나

대숲아래 한숨과 탄식만을 솎던 불면의 밤을

소나기 말 달려 더욱 깨우고 말던 양철지붕집은

무슨 귀농인가 뭔가 했다며 된장이건 뭐건

앞뒷집에서 듬뿍듬뿍 퍼 가고는

마을 울력 한 번 안 나오는 요란한 도회내기를 받았는데

탱자울 둘러 그 너머로 까치발 세우면

탱자가시처럼 눈빛을 세우더니 어느 가을엔 향내 탱탱한

노란 탱자를 건네주며, 니 것도 한번 만져보면 안 돼?

그러던, 정이네 탱자나무집은 또 어디로 갔나

이제는 담장마다 파란 아크릴판에 하얀 글씨로

7-1, 7-2, 7-7, 숫자만 붙은 마을의 집들이 평생 잡순

고기보다 더 많은 고기를 굽는 가든정이며

구암제 옆 무인텔은 갈봄여름 없이 세단들만 들이는데

항간엔 저수지 물이 희뿌연 것은 모텔 때문이라고 하다

향기로운 이름의 집들이 죄 길이 되었는데도

그 길로 하루에 두 번 오던 버스 더는 오지 않고

이따금 척추 꺾인 집 몇몇이 유모차를 밀고 나와서

동구 밖의 한 오백 년, 느티나무를 우수수 흔들다

 

 


 

 

고재종 시인 / 날랜 사랑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고재종 시인 / 고요를 시청하다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송이로 부푼다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

 

아무것도 새어 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 놓은 오월의

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연주를 듣는다

 

 


 

고재종(高在鐘) 시인

1957년 전남 담양 출생. 담양농업고등학교 졸업.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새벽 들> <사람의 등불>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쪽빛 문장> 등. 수필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제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제1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민족문화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