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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운진 시인 / 개종(改宗)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8.

이운진 시인 / 개종(改宗)

 

 

겨우내 베란다에서 찬바람에 떨며

한 송이 꽃을 피운 재스민

사는 동안 향기를 만들어 주는 이가 내게 없었으므로

흰 눈이 녹을 때까지 재스민나무 곁에 서 있었다

이파리뿐인 고무나무 흘겨보며

꽃 없는 운명도 살 만한가 하고

찬물을 아끼곤 했다

이태째 마르고만 있는 두 뼘짜리 치자나무에겐

날 풀리면 아파트 화단에 내놓으리

엄포를 놓았는데

봄바람에 꽃봉오리가 부풀고 말았다

젖이 돌아 퉁퉁 분 가슴처럼

빈틈없이 꽉 찬 하얀 꽃잎

물뿌리개를 든 나는 미련 없이

치자나무에게 돌아서며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찬양을 했다

스물일곱 송이라니!

겨우내 치자나무는 나를 용서하느라

온갖 신의 이름으로 기도했나 보다

 

 


 

 

이운진 시인 / 오른손이 모르는 것

 

 

오른손은 욕망에 순교하였다

숟가락을 쥐고 연필을 쥐고

더 많은 밥과 더 아름다운 거짓을 위해

슬픔이 필요한 반성을 버렸다

칼을 쥐면

수만 년 매 맞아 본 적 없는 산과 강에게도

무너져야 할 이유가 생겨났다

고통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오른손과 오른손이 만나

더 큰 모래성을 꿈꾸었을 땐

더 큰 오른손이 발명되었다

핏줄이 끊기고 손금에 균열이 간

오른손은 더 이상

이슬을 잡을 수 없는 손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오른손은 모른다

세상의 사람이란 사람 모두

이슬보다 다치기 쉬운 눈물을 가지고 있어

언젠가 그 모래성이 눈물을 불러오고 말 것을,

눈물로도 홍수가 난다는 것을,

 

 


 

 

이운진 시인 / 라일락의 봄

 

 

어제는 라일락이 피느라 어지러웠고

오늘은 향기에 엉켜 어지러웁다

마당가를 돌아서 하늘가를 돌아온 작은 새도

균형을 잃고 맨발로 비틀거리다

또 다시 부리를 처박는다

향기를 찍어 보겠다는 속셈이지만

라일락보다 먼저 날개를 퍼덕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라일락 한 무더기 날개에 달라붙는다

멍든 부리를 하고 새는 허공을 가른다

라일락 향기가 하늘을 건너간다

너무 납작하게 끝나는 봄날을

어딘 가라도 간절히 적어두고 싶은 것이다

그곳이 떨어져 누울 길이 아니라면

새의 날개와 날개 사이에 든

허공 한 구석이라도 좋다는 것인지

숨겨놓은 꽃망울까지 모두 밀어 넣느라

하루 종일 라일락나무 밑은 텅 비어있다

 

 


 

 

이운진 시인 / 내가 조금이라고 하는 사이

 

 

조금 떠나 있었지요

내가 조금이라고 하는 사이

사람들은 나를 다 잊어 주었지요

지난해의 눈사람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가는 것만큼 조금이었는데

당신 가슴에 박아둔 못이

붉은 녹을 껴입는 것만큼 조금이었는데

세상은 악착같이 기억을 지웠지요

그 기억의 바깥에서

나는 소문들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기를 기다렸지요

간혹 늦은 소문의 뒤를 잘라내며

희디흰 나무의 잠을 배우고 있었지요

거꾸로 선 채 붙박힌 채

어김없이 월경을 하고

소문도 없이 아이를 낳고

뼈를 말리며 떠나 있었지요

내가 굳이 조금이라고 부르는

그 사이

내가 정말 들은 것은

이슬 떨어지는 소리밖에 없지요

귀가 조금 밝아진 것뿐이지요

 

 


 

 

이운진 시인 / 설야(雪夜)

 

 

눈이 와요.

라는 말 얼마나 유정(有情)한지

함부로 전하지 못하겠네

 

창 밖에는 사르륵 사르륵

마치 전생의 장례식 같은

고요

한 없이 깊어가고

 

눈 오는 소리 안에는

내 귀에만 들리는 목소리 낭랑해지는데

 

눈이 와요,

이 무용한 독백은

끝내 허공을 건너지 못하네

 

눈송이 눈송이

내려와

한 그루 나무의 실루엣이 바뀌는 동안

나무보다 먼저 마음을 다 덮고

나는 생각하네

 

왜 추억은 아직도 눈빛을 약속하려 하나

왜 나는 붉은 심장인 듯 애써 지키려 하나

 

기억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찾을 수 없는 밤

그 먼 시절로부터

흰 눈이 오네

 

 


 

 

이운진 시인 / 별의 부음을 받다

 

 

불혹을 넘고 나니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다고

이미 너무 둥글어졌다고

수천 살 수억 살 먹은 별들에게 말을 하고

 

목숨 하나쯤은 거뜬히 받아 줄 밤하늘에서

마지막 길을 잃었으면

우주의 먼 구석인 허공에게 말을 하다가

 

신의 정원에서 홀로 피었다 지는 풀꽃처럼

소박한 이름으로 사는 하소연을

제일 빛나는 별빛에게 하려던 중이었는데,

 

그 큰 별은

무한의 너머로 가지 않고

이 지상의 어둠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장 현명한 슬픔 하나를 이해하는 중이다

 

 


 

이운진 시인

1971년 경남 거창 출생. 동덕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석사 졸업. 1995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톨스토이 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에세이집 『시인을 만나다』 『고흐 씨, 시 읽어 줄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