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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하해 시인 / 금산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8.

정하해 시인 / 금산사

 

 

너를 찾으러 천 리를 오니 눈물이 난다

영영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봐

 

구척장신인 미륵존불 앞에서

절 하나에 너를, 절 두 번에 또 너를

 

우리가 헤어진 것도 없으니 달리 찾을 방법도 없지만

 

법당 앞을 지키는

꽃무릇들과

 

오 층 석탑에 올라서니 해가 기울고 있다

용화세계였다

 

-시집 『다른 요일, 지나갔다』에서

 

 


 

 

정하해 시인 / 새가 날아가는 동안

 

 

아이는 잉태되고 우리들의 엄마는

녹슬어 이름이 없다

 

별들의 사나운 기운을 너는 풍경이라

점치고 자전을

통과하는 눈매는 멀리서 오고 간다

 

새가 물고 갔으려니 한, 사람의 해안가를

저물도록 돌다가

 

아가미 속으로 녹슨 어미를 다시 주워 담는

새가 날아가는 동안

 

아이들은 목덜미마다 어미가 새겨진 채 자랐다

간혹 바람을 잘라

허파가 둥글도록 어미는 꾹꾹 눌러 심어줬을 뿐

 

늙은 장미가

그 날아가는 동안만, 화폭처럼 아름다웠다

절절했던 것들은

북쪽에 머물러

어미를 끌고 가는 저 무례한 날갯짓이 얼마나

슬픈 색인지

 

새가 날아가는 동안

 

 


 

 

정하해 시인 / 선택

 

 

나무의자를 보면 그러니까 갈빗대를 눕혀놓은 것과

같아서 앉기가 그렇다

 

어느 정글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걸어왔을

저것은 상처에도 격이 다른 각도다

 

잘 짜 맞춘 상처 위로 달이 오래도록 칠하다 간 이유는

나무냄새, 그 희미한 것이나마 가두는 일일 것이다

 

목불상으로 앉았다면 세상의 모든 머리들이 달려와

조아렸을 텐데, 짜개진 등이 어쩌면 공덕을 짓는 중이겠다

 

이슬이 오는 쪽으로 천천히 빠져나가는 혼이

그저 거기서 맴돈다

 

 


 

 

정하해 시인 / 붓질을 당하다

 

 

비탈에 앉아

이슥하도록 말은 나오지 않고

까마득히 올려다본 하늘의 수박씨 같은 별에

잠시 정을 붙인다

사람의 골짜기마다 전별하는 손사래들

누구에게나 다 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여름을 빠져나오면서 무언가 두고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쓸모없는 것 훔쳐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저 의심스러운 것에

누가 붓질을 해 걸어두었다

 

-시집 『젖은 잎들을 내다버리는 시간』(시인동네, 2015)

 

 


 

 

정하해 시인 / 하구(河口)

새의 목덜미가

한 울음 쏟아낸 후였거나 사라진 발목을 애도하였거나

야위었습니다

분분 타전하는 모래로 하여 각이 생기는 건

본능은 아니라고

 

모래가 모래를 허물며

 

하구(河口)의 최초를 생각합니다

아득해져도

상관은 없겠습니다

 

새발자국이 삐뚤삐뚤

종종걸음 쳤을 그 발가락, 주물러주고 싶은 아침

 

에둘러 흘러온 것들도 이제 느릿느릿

밝은 곡선입니다

이곳은 잠시 잠깐 몸을 내리는 정박장이었을까요

 

모든 정면은 너그러웠고

물살의 허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모든 숨들이 여러 장면 닮았습니다만

 

제 몸을 눌렀다 폈다

이제 바다로 나가기 위한 연습이겠지요

우리가 여기서 이별한 시간은 또

오후입니다


 

 

정하해 시인 / 새가 날아가는 동안

 

아이는 잉태되고 우리들의 엄마는

녹슬어 이름이 없다

 

별들의 사나운 기운을 너는 풍경이라

점치고 자전을

 

통과하는 눈매는 멀리서 오고 간다

새가 물고 갔으려니 한, 사람의 해안가를

 

저물도록 돌다가

눈알 속으로 녹슨 어미를 다시 주워 담는

 

새가 날아가는 동안

아이들은 목덜미마다 어미가 새겨진 채 자랐다

찢어진 장미가

 

동안만, 화폭처럼 아름다웠다

절절했던 것들은

 

북쪽에 머물러

 

어미를 끌고 가는 저 무례한 날갯짓이 얼마나

슬픈 색인지

 

-제4회 시산맥창작기금 선정작

 

 


 

정하해(鄭河海) 시인

1953년 경북 포항 출생. 2003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살꽃이 피다』 『깜빡』 『젖은 잎들을 내다버리는 시간』 『바닷가 오월』. 2018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제4회 시산맥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