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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석주 시인 / 불두화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8.

장석주 시인 / 불두화

 

 

이 저녁 잎새들이 서걱거리는 것은

인생의 많은 망설임 때문이다

 

흰 발목의 빗방울들이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다녀간다

 

비 그치고 황금빛이 열린다

저문 마당귀에 선 나무에 매달린 불꽃의 입술들을 열어

사랑한다고 낮게낮게 속삭이는

저 불두화

 

 


 

 

장석주 시인 /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앵두나무는 의료보험증도 없는데

건강이 여전하시다. 올봄도

앵두나무는 원기왕성하게 꽃을 피웠다.

뜰에는 구름이 놀다가고

바람이 잠깐씩 얼굴을 내민다.

꽃진 자리마다 빨간 열매가 다닥다닥 붙었다.

칠순 노모는 늦게 노랫바람이 나서

복숭아마냥 부푼 무릎을 끌며

날마다 성북구청 노래교실에 나가고

늙은 앵두나무는 늘 심심하다.

 

둘 다 꾸준하시다.

 


 

 

장석주 시인 / 고인

 

 

발목이 시리도록 들판을 걷는다

저녁까지 혼절한 듯 잠에 빠져 있다

한 여자의 구름을 싫증날 때까지 경작한다

온갖 도박에 미쳐 날이 새고 지는 것도 모른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미친 피의 놀음이 되어야 한다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되고

가을단풍이 지기도 전에 눈보라는

저 서러운 붉음을 지우며 자욱하다

 

아아 살아 있다는 것은

왜 기쁘고 슬픈 일이 되어야만 하는가

 

고인은 자신의 배역을 마치고 무대 뒤로 사라진 배우다

 

헌옷 몇 벌과 읽던 책 누추한 이름을 남긴

고인은 남은 가족을 결속시키는 슬픔이다

 

새벽에 홀로 깨어나

마른 빵을 씹고

벽에 헛되이 어리를 찧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턴 빈 무대 뒤에 혼자 서서

무대가 없다고 툴툴대기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무지했기 때문이다

 

 


 

 

장석주 시인 /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 빠질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병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굶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화집의 움직임 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장석주 시인 / 잊자

 

 

그대 아직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대 아직 누군가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면

그대 인생이 꼭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그대 아직 누군가 잊지 못해

부치지 못한 편지 위에 눈물 떨구고 있다면

그대 인생엔 여전히 희망이 있다

 

이제 먼저 해야 할 일은

잊는 것이다

 

그리워하는 그 이름을

미워하는 그 얼굴을

잊지 못하는 그 사람을

모두 잊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다

 

잊음으로써 그대를

그리움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잊음으로써 악연의 매듭을

끊고 잊음으로써 그대의 사랑을

완성해야 한다

 

그 다음엔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 / 개미야, 개미야, 하루종일 너는 얼마나 가니

 

 

온통 백색 광선으로 들끓는 여름 한낮을 쉬지 않고

기어서 기어이 가야 할 곳이 있다,

 

교묘한 뱀들아, 덩치 큰 야생 쥐들아

두꺼비들아, 賣淫의 개들아,

 

나는 더 이상 방관자가 아냐,

 

 


 

장석주 시인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등단.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평론가로 활동 中. 시집 『햇빛사냥』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등. 제1회 애지문학상(문학비평 부문). 1975 월간문학 신인상. 1976 해양문학상 수상. 2013 제11회 영랑시문학상 본상 수상. 시인세계 편집위원. 현대시 편집위원.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창작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