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시인 / 젖는 종이
검정 잉크 몇 모금을 적시기 위해 마른 종이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탁자위에서.
새까맣게 그리고 여백 없이 적히기를 그러나 나락은 여지없이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우기면서 몰려오고 떨어지는 종이는 삶의 여지를 붙들기 위해 바람을 따른다
메마르고 두꺼운 종잇장에 눌려 있던 시간들만 아니었어도.
가혹한 우연이구나 어쩔 수 없는 흔들림이구나. 바람이 공중에서 쓰는 비평들
메마르지 않으면 기록될 수 없다는 뾰족한 것들의 뾰족함 속에서 어차피 내일은 다시 흰 종이를 찾는 그들의 풍습 속에서 나는 가만히 순장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비가 내린다 누군가 웅덩이로 미끄러지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인부들이 퍼 담는 한 삽의 흙처럼 내린다 투두둑 투두둑, 몇 번의 삽질에도 금새 빗물에 묻히는 종이의 얇기
젖은 종이는 종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종이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요? 젖은 저는.
밤새도록 흰 종이에 새까맣게 써 내려간 질문은 떨어지는 빗물에 해석할 수 없는 추상화가 되어버렸는데. 우연의 기법을 창시한 거장, 바람이 분다 매우 여리게 매우 세게 또는 매우 아무렇게
젖은 종이가 말라가고 있다 아무렇게 구겨지며 마르고 있다
오래 너부러져 있다 일어난 몸에는 구김이 많았다
별거 아니라는 듯 툭툭 털어낸다
타성에 젖어들고.... 만다.
김광호 시인 / 책장에서 쓰러진 책을 세우는 시간
한 줄이면 충분할 서문을 긴 비문으로 적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평문보다는 오래 세워두는 비문이 낫다는 마음으로 쓰여진 책이 있다
책장에 홀로 세워둔 책은 작은 흔들림에도 쓰러진다
안녕과 안녕 사이에 단단히 세워두고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리기로 했어
스스로 펼쳐서 읽을 수 없는 책의 속성 위로 쌓이는 것들
무관심과 먼지와 그리고 흰 눈들
머리에 쌓인 흰 눈을 털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요
눈사람의 목도리를 훔쳐 달아난 사람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성냥팔이 소녀 같은 책이 더 잘 팔렸으면 좋겠다
눈 오는 거리에서 홀로 서 있는 책이었다가 흔들리는 책이었다가 쓰러진 책이 된다
거리에 쓰러진 책 위로 눈이 쌓이면 조금은 눈사람의 몸통처럼 보이겠지
성냥팔이 소녀는 폭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쓴다.
김광호 시인 / 사색의 징검다리-21
언제나 이웃에 미소를 보내는 이여 당신의 미소는 고운 평화를 주어요 가족에게 애정을, 친구에게 신뢰를, 소외된 이들에게 용기를 안기어요
애정과 신뢰와 용기는 포근하여요 깊은 산속에 사는 시원한 바람이듯 세상을 맑고 밝게 해주는 빛이어요 당신은 미소로써 은혜의 빛 되어요
당신을 마주하면 마음이 뿌듯해요 기도를 통하여 만난 반가운 모습은 생활 속에서 기쁨의 날개를 달아요 해오라기인 양 하늘을 훨훨 날아요
초원에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 같은 당신의 해맑은 미소여 복된 미소여 나에게 오셔요 사뿐히 다가오셔요 우리가 꾸민 둥지에 등불이 되어요
김광호 시인 / 서비스센터
당신은 언젠가 핸드폰을 고치러 서비스센터에 간 적이 있어요
무언갈 고치는 일을 멈추려면 무언갈 사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당신은 누군가 사는 일을 멈추었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어요
모르는 이름이라 슬프지는 않았겠지만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 겁니다 사람들도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 거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은 그 순간 사람들 기억에서 좋은 사람으로 나아지고 있을 것이고 그러면서 사람은 수리가 되는 거라고
그렇게 믿으면 모든 것을 멈추는 일이 가능한 일이 될까
수리할까요
서비스센터 직원이 물어보면
나는 생각하게 됩니다
남아있는 생활비와 남아있는 사람들과
결국엔 네라고 대답하는 나에 대하여
희망은 네가 켜지 않았으면 고장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 희망을 켰고 서비스센터 직원은
어두운 작업장에서 반짝이는 기계를 하나 꺼내어 크고 휜 날개를 펄럭 펄럭이면서
수리된 나를 건넨다
사람들이 이제 나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거라고
꿈에 젖은 잠을 깨고 나면
꿈에 젖어버린 마음을 하나씩 하나씩
말려보느라
밤의 전력을 모두 소비하는 중이고
사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데
서비스센터의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5월호 발표
김광호 시인 / 미아의 숲
* 여보세요? 도와주세요. 어디십니까? 우리가 잃어버린 숲이요. 길을 잃어버렸습니까? 아니오, 우리를 잃어버린 건데요. 그럼 지금이라도 우리가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담 빛을 켜둔 채 잠에 드세요 켜둔 불빛을 따라 우리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
우리는 말 없이 잃어버린 숲의 출구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소년이 우리가 잃어버린 숲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저 기다림 뿐이었다는 걸 우리는 이해하는 중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죽은 자신을 바라볼 때 영혼이 이해한 마음. 확산하는 숲의 둘레. 점점이 점.점.이 되는 멀어짐. 출구가 점점 멀어질수록 우리는 좀비처럼 피를 흘려도 아프지 않은 몸이 되어 단 하나의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잃어버림 속에서 되살아나기 위해서
*
우리는 하나둘씩 환한 빛이 가득한 집을 골라 들어갔다. 가장 빨리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가장 사나운 친구가 가장 환한 집을 찾아가서 불을 끈다. 그는 그렇게 편안한 잠이 들었겠지. 아직 환한 집을 찾지 못한 우리는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그의 포근하고 달콤한 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 아무도 부럽다는 말을 꺼내지 않고 다만 오래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모닥불이 이글거리는 눈빛을 가지게 되었어. 날이 밝으면 다시 환한 집을 찾아 미친 듯이 달리는 우리들 중에 눈을 감고 두 팔을 더듬거리다 넘어지는 친구들이 있을 텐데
그것은 모두 모닥불을 오래 바라보았기 때문이야
*
우리는 서로 밀치고 넘어트리면서 각자 조금이라도 환한 집을 차지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고 이제 대부분 환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으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없게 되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
멀리서 바라본 낡은 집은 아주 희미하고 흔들리는 빛을 가진 집이고 저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하나의 집이라는 것과 저 집이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집이라는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천천히 터벅터벅 때로는 잠시 발길을 되돌리기도 하면서 그 집으로 걸어갈 수 밖에 없고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저 집에는
왜 엄마가 있어야 했을까
왜 쇼파에 누워서 아주 희미하고 흔들리는 빛이 방영되는 연속극을 켜둔 채 잠들어 있어야 했을까
TV의 마지막 빛을 켜두고 잠든 엄마를 바라보면서 아직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형의 빈방을 지나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숲으로 다시 간다 다시 가서
아직도 잃어버린 숲에서 무엇을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장작을 모으는 우리를 가만히 불러모아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애들아, 어두운 세상을 구하고 왔어.
*
숲의 우리는 언젠가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려도 피를 흘려도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돌아갈 집은
진실로,
숲이었으니까. -웹진 『시인광장』 2024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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