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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수현 시인 / 해거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9.

박수현 시인 / 해거름

 

 

바람이 지친 발끝을 내려

늘어진 나뭇잎을 흔들다 맙니다

강물 속 저어새 부리가 길어집니다

넘기던 책장이 손가락에 달라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햇살이

책상 위, 먼지 알갱이를 건드려보다 갑니다

 

 


 

 

박수현 시인 / 봄요일曜日, 차빛귀룽나무

 

 

그 물가에는 차빛귀룽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햇귀를 끌어당겨 푸른 머리핀처럼 꽂고

심심해지면 고요 밖에서

한눈팔듯이 제 몸을 비쳐보기도 한다네

그러고 나면 어찌 눈치 채고 빈 데마다

쓸데없는 구름그늘끼리 몇 평씩 떠 흐르네

낮결 내내 부젓가락처럼 아궁이를 뒤지던

부레옥잠도 어리연도 마냥 엎질러져

복사뼈째 찧으며 물살을 나르네

 

한나절 봄빛을 덖어낸 차빛귀룽나무

조붓하고 어린 나비잠을 스치며

희디흰 산그늘 한 마리

드문드문 허기져서 느린 봄날을 건너네

 

 


 

 

박수현 시인 / 강릉

 

 

 편지는 일년 만에 당도했다 작년 여름 바닷가에서 부친 편지였다 흰 봉투를 나이프로 뜯자 파도 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모래펄에 팬 낯선 발자국들이 동봉되어 있었다 내가 송부한 것은 눈부신 수평선과 수평선 끝에 눈썹처럼 걸린 흰 돛과 그보다 더 흰 팔월의 뭉게구름과 그 곁의 연필 밑그림 같은 낮달이었다 그런데 내가 평생 바다만 바라보는 해변의 낡은 우체통처럼 서서 받아 든 것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신새벽 꿈 같은, 해식애(海蝕崖) 너머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괭이갈매기 무수한 울음 너머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내 청춘의 휘파람 소리뿐이었다 파도에 닳아 조금씩 없어지는 모래펄의 낯선 발자국 같은 휘파람 소리뿐이었다 한때 누군가의 연인이었을 이의 뒷모습이 어느 황폐한 별자리처럼 자꾸 어두워지는 그해 여름 강릉 앞바다, 또는 내 청춘의 불온하고 아름다운 미제 사건 파일

 

-《동리목월 》 2023년 가을호 발표

 

 


 

 

박수현 시인 / 미음

 그녀가 미음을 뜬다 묽은 죽 한 보시기의 그것, 무슨 도저한 의식처럼 조심조심 한 숟갈씩 뜬다 뭉근하게 끓여내 베주머니로 짜내온 것, 오래 우물거린다 눈을 감고 싶은 사람과 살고 싶은 사람의 사이의 저 미음, 미음으로 이어진 길을 에돌면 백일해를 앓아 열에 들뜬 아이가 있고, 풍로에 부채질하며 쑤어낸 미음을 한 숟갈 더 먹이려는 마음이 있다 미음 한 보시기도 다 비우지 못하고 다시 허리를 누이는 그녀, 오후의 긴 햇살이 드리워진 그녀의 오른쪽 얼굴이 여즉 밝다 죽음 곁에서 온몸을 탕진한 그녀, 반쯤 뜬 눈으로 주위를 더듬거린다 세상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처럼 축축하고 고요하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수수꽃다리 냄새가 난다 틀니를 물컵에 담궈 두고 잠든 저 미음 같은 영혼에게 나는 무얼 건네야 할까 미음보다 더 흐린 잠이 똑, 똑, 이마 위에 떨어져 내리는 것을 지켜본다 오후 네 시가 한 보시기 미음처럼 말갛게 가라앉는다

-계간 『서정시학』 2024년 여름호 발표

 


 

 

박수현 시인 / 처녑

 

 

여름나기로 단골 정육점에서 처녑을 샀다

소의 세 번째 위장인 처녑은

천 장의 잎새라는 뜻이랬다

검정 비닐봉지에 싸인 채 서너 근으로

갈무리된 전 생애의 중량

밀가루를 묻혀 아코디언 같은 주름을 치댄다

위장 하나 다스리는 일이

첩첩산중 만경창파를 이고 넘는 것 같다는데

어쩌자고 이 초식성 짐승은

깊고 어둔 위장을 네 개나 붙잡고 있는 걸까

쇠뜨기, 독새풀의 독하고 푸른 숨결과

매미의 울창한 울음과

마지기 마지기 쏟는 작달비를 오래 되새김질 했겠다

 

질기고 무더웠던 여름날을 견뎌내느라

크고 순한 짐승의 위장 같은

울음의 겹 안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

 

처녑 한 젓가락을 기름장에 찍는

적막한 허기의 저녁,

씹을수록 싱싱해지는 천 장의 이파리가

가망 없이 몸을 뒤집는다

 

 


 

 

박수현 시인 / 우포늪 시집 속으로 걷는다

 

 

해그림자가 젖은 이마 닦는다

물새 날아오르는 우포늪 서성이다

 

자박자박 물속으로 걸어간다

 

바람에 휘감긴 스카프 걷어 내듯이

발목 감는 어둠 털어 낸다

우포늪 왁새* 시집 행간 따라

늪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초사흘 달이 개망초에 숨었다

미루나무 이파리에 머문 바람

사르륵 자갈밭에

물 빠지는 소리로 몸 부빈다

 

깨물어 뱉은 어둠에 걸려

풀물이 든다

헐거워진 나이

방광이 놀라 눈물 쏟는다

 

상처입은 몸에게 신호를 보낸다

문명이 주는 혜택에서 사라지는 것들!

늪의 생명 위협하는 덫에 걸려 넘어진다

 

어둠 속 발광하는 유충 반딧불

자연이 준 선물,

지상에 내린 별빛 속으로 왁새 울음 걸어간다

 

* 배한봉 시집 <우포늪 왁새>

 

 


 

박수현 시인

1953년 대구에서 출생. 본명: 박현주.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시안』 『샌드페인팅』 등.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2020년 제4회 동천문학상수상. '溫詩' 동인. 《시안》 편집위원.